추억[문학의 즐거움]

현대시(목록2-12편)

로뎀추리 2009. 9. 1. 14:04

[현대시]
 
기찻길
이복현
 
 

한 곳을 향해 가곤 있지만
언제나 적당한 거리로 떨어져 있는
우리들의 옆모습

그리움이란 이렇게
가까이, 그러면서 낯설게
안타까운 목소리로 서로를 부른다

순간 순간 가슴속의 별을 바라보며
창 밖으로
낯선 풍경들을 지우며
아득히
밤의 마을에 피어나는
등불들을 따라가 보지만
우리가 전생에 꿈꾸었던 그 꿈이
지상의 이 날에 재현된 건 아닌지
망설일 때에
내 어깨를 흔들며
멈추어 선 기차

밤 새워 달려간 어느 산골
이름 모를 간이역에서
기다리던 너를 만나지 못해
끝내 허망히 돌아오던 날

옥수수 밭을 지나, 낡은 토담집 안마당에
부끄럼 태우며 서 있던 가을 감나무,
그 무르익은 알알의 슬픔들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흘러가던, 그
뺨 위를 적신 흔적 같은.

 

 

[현대시]
 
그믐밤
이복현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나에게
권총을 겨누고 있다

발사 -, 발사 -
정적을 깨는 총소리와 함께
수많은 황금의 총알들이
가슴으로, 가슴으로 날아와 박힌다

총알이 날아와 박힌 자리마다
아픔이 눈을 뜨고
벌레들도 깨어있다

아득한 영혼의 바닥을 씻어 흐르는
노래의 정령들
서서히
건반 위에 놓인 어둠을 타고 와
가슴에 박힌 금빛 총알들을

  루
    만
  진

.

 

 

[현대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사랑할지를 알고 있는 바다
이복현
 
 

내가 아는 바다는 울지 않습니다
다만, 노래할 뿐입니다

나의 바다는
몸을 깨쳐 노래합니다
바다 아닌 모든 것이 감동할 때까지
자신을 버립니다

바다 밖으로 자신을 힘껏
내어 던져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물보라 흰 거품 속에
진한 눈물을 섞어 버립니다

그 거칠고 어눌한, 그러나 진실한
고백을 통해

마치
'이것이 사랑이다'라고
가르쳐 주듯이 -

 

 

[현대시]
 
황톳길
이복현
 
 

물려받은 핏줄 같은 흙길을 밟아 가면
까치집보다 더 높은 
남천南天에 닿는 집

한때 산지기였던 우리 아부지
눈물보다 따뜻한 물줄기
흘러내리는 곳
두견새 울음에 앞뒷산이 붉게 젖고
소쩍새 울음에
대숲이 흔들리던, 거기

소 몰고 돌아오는 어린 소년의
꼴망태 우에서 빛나던
저녁 해
그 해를 구워먹고 어둠이 된 소년이
도시의 희미한 형광불빛 아래서
살아남은 이법을
배우고 있다

오늘이 배고프면 내일 어찌 꿈을 꿀까
견딜 수 없는 아픔을 곱씹으며
어리석음을 좇아
용케도 살아 남아
좁은 골목 끝
낮은 창가에 엎드려 잠들지만
환한 꿈속을 더듬으면
길은 언제나 꿈틀대는 정맥
붉은 황톳길이다.

 

 

[현대시]
 
수태
생산을 위한 몸부림
이복현
 
 

아득한 곳의 그리움으로부터
수관樹冠을 타고
나의 몸 속을 굽이쳐 흘러온
강물소리 들린다

겨드랑이가 가려웁기 시작한다
몸 속의 푸르고 연한 그 무엇이
꿈틀거리며 솟아나려 한다
이제 막
세상 밖으로 머리를 내밀려는 태아의
살내음 같은 순들이
내 몸 속 여기 저기서 힘차게
꿈틀거리며
살갗을 뚫고 돋아나려 한다.

 

[현대시]
 
하늘에 닿는 길
이복현
 
 

저무는 산촌
초가지붕 위로 피어오르는 저녁연기는
지상에서 천국으로 뻗어 닿는
가장 따뜻한 길이라 할 수 있으리

꼴망태를 등에 멘 초동의 긴 그림자가
빈 논배미를 건너
마을 안 어둑한 골목길로 접어들면
흙담을 타고 넘는 소죽 냄새
가마솥 뚜껑 들썩이는 소리에
배가 고파 씩씩대는 마구간 소의
거친 숨소리
커다란 눈망울 깊이
말간 어둠이 빛나고 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이웃으로 마실 갈 차비를 하고 있는
초저녁별은
반쯤 열린 대나무사립문을 밀고 들어와
처마 낮은 뒤란으로 숨어들고
대청마루 밑 마른 흙 자리에선
늙은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고 앉아
깊은 잠에 들었다

모든 것이 호수의 바닥처럼 고요해졌을 때
귀를 씻는 풀벌레 노래가
마을 앞 개울물소리를 타고 달려와
가슴 바닥으로 스며든다

 

 

[현대시]
 
금강錦江
이복현
 
 

누가 펼쳐 놓은 열두 폭 병풍인가
산과 나무가 물구나무서서
가벼이 흔들리는 그림
씻은 모래 속을 파고드는 햇살에
수많은 꿈비늘이 반짝이며 일어선다
수초를 헤치고 나온 물고기의 맑은 눈이
사파이어처럼 빛난다

누가 열어놓은 크고 맑은 거울인가
절절이 가슴 적셔 파노라마 지는
저 깊이, 저 물 속, 저 흐름의
투명한 자유
욕망으로 걸러질 수 없는
빛의 노래!

저녁이 되면
고요한 숨결 속에 살아나는
앵두빛 그리움을 본다
투망질 할 수 없는, 저

다리 밑을 흐르는 그림자의 고요
해와 달이 만나서 악수를 하고
눈맞춘 별들이 떠나가는 기슭 밑
폭풍을 지켜 낸 불변의 가슴에
천년의 푸른 꽃이 피어난다.

 

[현대시]
 
갈증
이복현
 
 

어둠을 가르며 달려온 햇빛
제 무게를 견디며
밤을 지새운
몇 방울의 맑은 영혼들

거기,
시들어 가는 도시 한 모퉁이
균열된 아스팔트 틈 사이로
고개를 내민
질경이를 본다

수많은 구두 굽에 뭉개어져
상처투성이인 몸으로
대공 꼿꼿이 세워
가쁜 숨 몰아쉬는 한 포기 풀

누가
빛을 갈망하는 저 투사의
푸른 숨통을 막을 수 있겠는가

퇴근길에 사람들이 우루루
지하철역 쪽으로, 버스정류장으로
강이 되어 흐른다
색색의 차들이 미등을 켜고
붉은 강물이 되어
빠른 유속으로 흘러간다

나도 하나의 낙화한 꽃잎
물결에 휩쓸린다.

그런데 어쩐 일인가
목마 마르다
쓸쓸함이 목구멍을 차고 오른다

오늘도, 나는
도도히 흐르는 강물 앞에서
목이 마르다.

 

 

[현대시]
 
낡은 의자
이복현
 
 

누군가가 앉았다가 떠나기를
수없이 한
작은 가슴에
따뜻한 사랑이 배어 있다

남기고 간 체온들은 뿔뿔이
바람에 흩어지고 없지만
침묵의 시간들을 품고 앉은 의자는
지나온 내력들을
낱낱이 새기며 앉아 있다

누구에게나 차별을 두지 않고
지쳐 돌아온 삶을
편안히 받쳐주었던 자비의
한 생애도 낡아
이제는 삐걱거리는 아픔으로
관절염을 앓고 있다.

세월이 깊어갈수록
이별이 가져다 준 슬픔의 무게를
견딜 수 없어
의자는 가만히
입술을 깨문다.

 

 

[현대시]
 
니크트* 묘실 속의 이집트 여인
이복현
 
 

너의 눈은 새보다 아름다운 날개
수평의 하늘을 비행한다
레바논의 가장 높은 산에
등불을 켜는 너의 코
입술은 대지의 깊은 곳을 핥고 있구나
화관花冠은 네 정념의 사슬,
절제된 사랑의 표징이지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있는
뜨거운 숨소리가
묘실에 가득한데
몇 천년을 나크트의 벽에 붙어
떠나지 않는 너의 뒷모습,
그 출렁이는 머릿단!

 

 

[현대시]
 
입적
이복현
 
 

옷 벗은 나무의 까칠한 등뼈에
부서질 듯
바람을 견디며 붙어있는 벌레의 껍질
사라진 생의 둘레에
아픔을 남기고 간
부질없는 흔적들

가시덤불 사이에 허물을 벗어 두고
땅속 깊이 기어드는 뱀
벌레들은 때묻은 옷을 벗고
나무와 바윗돌의 상처 속으로
스며든다

새 살을 입고 태어나기 위해
흙의 숨소리를 빨아들이기 위해
지금은
허물을 벗고 잠들 시간
지친 존재의 껍질을 만져보고
조용히
새로 올 봄을 준비할 시간이다.

 

 

[현대시]
 
입적
이복현
 
 

옷 벗은 나무의 까칠한 등뼈에
부서질 듯
바람을 견디며 붙어있는 벌레의 껍질
사라진 생의 둘레에
아픔을 남기고 간
부질없는 흔적들

가시덤불 사이에 허물을 벗어 두고
땅속 깊이 기어드는 뱀
벌레들은 때묻은 옷을 벗고
나무와 바윗돌의 상처 속으로
스며든다

새 살을 입고 태어나기 위해
흙의 숨소리를 빨아들이기 위해
지금은
허물을 벗고 잠들 시간
지친 존재의 껍질을 만져보고
조용히
새로 올 봄을 준비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