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문학의 즐거움]

현대시(제3목록-12편)

로뎀추리 2009. 9. 1. 14:09

[현대시]
 
미조항에 저녁이 오면
이복현
 
 

멸치잡이 어선들이 속속 돌아오고
검은 팔뚝의 사내들이
어머니 품속 같은 포구로 들어서면
살아 굼실대는 멸치를 털어 내고
그물을 접는 마을사람들

붉은 심장을 꺼내어 바다에 던지는
고단했던 하루의 막장 뒤로
미조항 선술집에 등불이 켜이면
그을린 이마의 사내들은
속 맑은 뱅어가 되어
낯선 여인의 술잔 옆에 놓인다

처음 만났을지라도
한 잔 술로 따뜻해 질 수 있는
섬사람들
잠시 바라보는 눈길만으로
촉촉해진다
주고받는 술잔에 파도소리 넘쳐나면
어느새 절로 거나해진 사람들
젓가락장단 따라
낮은 불빛에 흔들거릴 때
밤바다 수면 위로 연꽃처럼
솟아오른 노래들이
나그네 마음을 추억의 배에 태워
별들이 기다리는 머나먼 밤의
수평선으로 데리고 간다.

 

[현대시]
 
개심사開心寺
이복현
 
 

마음이 눈을 뜨면
그대의 사랑을 볼 수 있겠는가?
그대의 슬픔을 만질 수 있겠는가?

비오는 날, 개심사에 와서
당우를 넘어서는 문턱 앞에서
얼어붙은 발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잠든 부처님이 깨어나실까 봐
새들도 가만 가만 날아 앉고
목탁소리 조차 볼륨을 낮춘 절 마당에
홀로 서 있는 그림자 하나
문득, 바람결에 실려 온
마애삼존의 목소리 -

보이느냐
저 종루 끝에 매달린 바람소리가?
듣느냐
육해肉海의 파도를 빠져나가려는
저 심검당 기둥의 몸부림을?

 

 

[현대시]
 
부자가 아니라도
이복현
 
 

갈 곳 없는 주말이다

비오고 바람 불 때
혼자서
젖은 도시의 뒷골목을 어슬렁거린다

청바지 허름한 주머니 속에
꼭꼭 숨어있는
구겨진 지폐 한 장으로
삼류극장에서 종일토록
동시상영 영화를 볼 수 있다

흐리면 흐린 대로 그만이지만
어쩌다 날 좋은날
호주머니 가벼이 빈손 찌르고
입장료 한 푼 없는 공원길을
산책할 수 있으며
공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누릴 수 있으니
부자가 아니라도 행복하다.

생각에도 날개가 달리고
마음가는 곳 어디라도
흐를 수 있으니
나는 어느새
하늘을 나는 새가 된다

부자가 아니라도 나는 좋다
진정으로 나를 좋아하는 친구가 있으니
지나가다 손잡고 포장마차 들어가
꼼장어 한 점, 소주 한 잔으로도
푸석한 마음을 적실 수 있으니
근심 많은 제왕보다는
가난한 삶의 따뜻함이 좋다.

 

 

[현대시]
 
진남루에 올라
이복현
 
 

잃어버린 애인의 이름 같은
해미海美에 와서
진남루 높은 곳에 마음을 기댄다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이란 이름을 얻기까지
어두운 역사의 장막 뒤에서
얼마나 많은 아픔들이 숨져야 했는지!

병인년의 절규가
석벽의 틈새마다 숨어 있는데
푸른 담쟁이넝쿨이
진혼의 소리를 감싸안고 자란다

호야나무 밑동에 묻어
삼백년도 더 넘게 씻기지 않는
기도소리 들린다

천의 영혼
한 사람 한 사람
돌덩이보다 무거운 침묵을 껴안고
십자가 밑에 엎드려 있다
그들이 떠메고 간
역사의 무게 속에는
입술이 얼어붙은 새들의
목쉰 슬픔이 묻어 있다.

 

 

[현대시]
 
서귀포
이복현
 
 

저물어 가는 바다는
제 몸의 멍든 즙을 짜내며
울고 있다

바다로 가는 낯선 길목 어디쯤
흐드러진 유채꽃밭
날개를 다친 나비 한 마리
미로에 빠졌다

아직도 눈먼 바다에 이르지 못했는데
아직도 찾지 못한 길이 있는데

길은 외길
나비는 까마득히
어둠에 젖고 있다.

 

 

[현대시]
 
몽상의 편지
이복현
 
 

우체국이 없는 나라에서
수신인도 없는 편지를 부친다
봉투 속에는
검고 딱딱한 씨알들을 담는다
숨소리 깊은 내 마음이다

누군가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사람이
내 편지를 열어 보았을 때
우산 없이 길을 나선
그 봄날의 한 날처럼
축축한 생의 모퉁이를 걸어오다가
가랑비 젖은 가슴에
봄을 심어 줄 꽃씨 몇 낱
쏟아져 나오면
그의 세상은 필시
꽃처럼 환해질 것이라 믿으며
그리움에 우표를 붙인다

서늘한 저녁바람이
유리창을 흔들어대면
골목길을 비추는
가로등 같은 한 사람이
불빛 젖은 커튼을 걷고
마음의 창을 열어
고요한 천상의 수면 위에 수놓은
그리움을 가만히 올려다보며
그 녹슬지 않는 사랑의 불빛들을
꽃씨처럼 가슴에 간직할 것이기에.

나는
우체국이 없는 나라
수신인 없는 편지를 부친다
세월에 할퀸 사내의
덜컹거리는 가슴에서도
봄을 기다리는 숨소리를 들을 수 있음을
알리고 싶어서.

 

 

[현대시]
 
고니
이복현
 
 

물 한 모금 마시고 우러르는 하늘엔
빛 바랜 가을엽서가
길이 먼 강 목선처럼 떠 있는데
흐름이 깊을수록
쓸쓸하지 않게
헤엄치는 법을 배워 둬야지

이런 날에 나는
한 마리 고니
펜의 촉 같은 부리로
물위에 시를 쓴다
간혹, 물고기들도
내 시를 읽을 수 있도록,

나는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 앞을
옆모습을 남기며 지나간다
그들의 가슴 속 고요한 수면 위에
지울 수 없는 파문을 새기며

까칠한 손이 가슴을 스칠 때
몸의 가장 따뜻한 곳
깃털 하나 뽑혀
수면 위로 떨어진다

그 깃털, 맑게 닦은 하늘에
새털구름으로 흐르는 걸 본다

가벼운 목숨의 한 정표다
곧 사라지고 말 흔적이다

나는 믿지 않는다
사랑이 영원하리라는 그 말
깃털 같은 그 언약을.

 

[현대시]
 
눈을 뜨니, 또 하나의 길이
이복현
 
 

실로암 연못에 달이 뜨면
진흙을 발라 눈을 씻고
광명을 찾은 한 소경이
이 세상 처음으로 소경이 아닌 눈으로
한 사람의 자아를 만나게 되나니

나르시스 -
슬픈 백성은 아직도
한 들을 건너지 못했는데
누가 우물 속의 얼굴을 건져 올려
낯선 상봉을 주선하겠는가

달이 지면 연못도 눈을 감고
어둠이 지배할 것이네
하지만 걸어가야지, 손잡고
사막을 건너가야지
거친 바람에 몸을 싣고
비에 젖어
눈물의 골짜기를 건너가야지

누가 아는가
혹 거기, 가난하지만 가슴이 비옥한
농군의 딸이 있어
들꽃 같은 웃음을 나누어줄지
누가 알겠는가
찐 감자 한 알이라도
따뜻한 그 마음을 담아 줄지

 

[현대시]
 

이복현
 
 

돌밭 깊이
어둠 속을 더듬는 뿌리의 곤고함은
푸르고 선명한 핏줄에 달린
초록 잎새의 살랑대는 기쁨보다
아름답다.

우이동 골짝
바위틈에 뿌리내린 소나무 한 그루
찌들은 육신을 부여잡고
위대한 정신의 한 세선을 파고드는
침묵의 힘!

완강한 시도를 견디지 못해
마침내 가슴을 연 바위
겸연쩍게 끌어 모은 가랑이 사이로
온몸을 뒤틀며 뻗어 내리는
뿌리의 힘!

무성함을 자랑하는
잎새의 웃음마다
아픔이 이슬로 맺혀있다
이슬은
깜깜한 세상의 틈을 엿보며 뻗어 내린
뿌리의 아픔에서 뽑혀 나온
맑디 맑은 결정인 것이다.

 

 

현대시]

 
베 짜는 여인
이복현
 
 

저 여인이 앉아 있는 베틀은
모시 무명만을 짜는 것이 아니다
눈물과 그리움,
그리움에 흔들리는 불빛 등이 뒤섞여 짜인
빛나는 피륙인 것이다

누가 저 여인이 이루어 낸 하나의
사랑엽서를 읽을 수 있겠는가

봉함 된 침묵의 틈 사이로
흥얼거리는 한의 가락이 삐져나와
보푸라기처럼 나풀거리며
시간의 갈기를 쓰다듬고 잠재우는 사연들을
읽을 수 있겠는가

손에서 손으로 북이 돌고
바디를 친다, 바디를 친다
어둠이 닫히는 소리 - 촘촘히
그리움의 씨줄이 박히는 소리 -

달빛은 아직도 문을 열지 못하고
창호에 비친 여인의 그림자를
긴 팔로 쓰다듬을 뿐, 좀처럼
흰 고무신 놓여있는 토방을
넘지 못한다.

 

 

[현대시]
 
빈센트 반 고흐의 과수밭
이복현
 
 

빈센트 반 고흐의 과수밭 과수나무는
라면가락 같은 아지랑이를 먹고 자란다
마치, 아기기린이
벼랑으로 뻗어 가는 칡순을
돋음발로 뜯어먹듯
아지랑이를 뜯어먹고 자란다
땅속 깊은 곳에서
대지의 땀구멍을 빠져 나온
비단실 같은 아지랑이를,

빈센트 반 고흐의 과수밭에는
19세기 중엽에 떠오른 태양이
아직도 지지 않은 채
과수밭 한쪽을 비쳐주고 있다

빈센트 반 고흐의 과수밭에는
아지랑이를 먹고 자란 과수나무가
더 큰 아지랑이가 되고 싶어서
꾸불꾸불 하늘로 올라갈 때

줄을 지어 승천하는 과수나무 사이로
밀짚모자를 쓴 한 아가씨가
무지개사다리를 밟고 하늘복판으로
올라가고 있다.

 

[현대시]
 
오후
이복현
 
 

시골의 가을볕은 따습기만 하여
기대어 누우면 언제라도
잠이 들 것은 같은 오후

건초더미 위로
예쁜 치아를 가진 햇살이
내려앉는다
마른 잎 위에 가만히 엎드려
풀 향기를 맡고 있는 잠자리
눈망울 속으로
목련꽃부리 같은 흰 구름이
보송송 잠겨온다

사는 일 로는 심심하여
그늘에 들앉아
바람에 실려오는 풀무치소리나
귀 기울이면
지나온 아픔은 아픔대로
살아갈 걱정은 걱정대로 그렇게
흘러 못 단 강물로 지나가는 것을
애면글면 가슴 태운 날들이
날개를 못 접고
조롱 끝에 잠든 명주잠자리같이
불안한 휴식으로 매달려 있었음을
알곤 있었지만
내겐 늘 그 불안한 휴식이
필요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