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문학의 즐거움]

현대시(제4목록-12편)

로뎀추리 2009. 9. 1. 14:13

[현대시]
 
지금, 숲에서는
이복현
 
 

2월의 끝자락

새 없는 빈 둥지에
햇살만 가득하다

지금, 숲에서는
나목의 그늘, 마른 잎을 헤치고
쏘옥 고개를 내민 부용초
희고 긴 목둘레를
따뜻한 바람이 휘감고 돌며
가쁜 숨 몰아쉬고 있다

봄이 오는 길목 어디쯤서
서투른 사랑을 나누다가 들켜버린
바람이 지금 내 안에
불어오고 있다
마른 잎 쌓인 가슴언저리
잔설 녹아 젖은 촉촉함 밑으로
희고 맑은 뿌리를 뻗어 내리는
연초록 생명과 대지의 밀월
숨가쁜 신음소리 한창이다.

 

 

[현대시]
 
겨울에 관한 단상
이복현
 
 

다정한 친구와
인동차 한 잔을 나누어 마시며
눈 내리는 겨울밤을 지새운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아랫목 가까이 무릎을 맞대고 다가앉아
지펴 올린 이야기들은
그 얼마나 따뜻한 화롯불인지

바람에
문고리 흔들리는 소리에
괜스레 방문을 열어본다

엊저녁에 다녀간 이웃 친구의
고무신발자국이
토방 밑에서 사립문까지 이어져 있다
발자국이
눈발에 조금씩 지워져 갈수록
마음 속, 정에 데인 자국은
선명해진다.

이 밤도
유년의 마을 어느 사랑방에는
몇몇 소년들이 모여 앉아
꿈을 얘기하고, 희망을 노래하겠지

이글대는 화롯가에 다가앉아
상기된 얼굴로 마주보며
고구마 익어 가는 냄새에
흥건히 젖고 있겠지
군밤 터지는 소리에 소스라치며
그칠 줄 모르는 웃음소리로
고요한 밤을 뒤흔들며
풋풋한 우정을 뿜어내고 있겠지.

 

 

[현대시]
 
겨울, 참새의 죽음
어느 무명시인의 영전에
이복현
 
 

누가
참새 한 마리의 죽음을 기억할까
겨울 강가 - 젖은 갈대의 그늘 아래
얼어죽은 새의
서리 묻은 깃털을 기억할까

누가
지상의 하늘을 건너
대숲을 힘차게 차고 오르던
어제의 참새를 기억할까
그 참새의
빳빳한 죽음을,
이슬방울같이 맑고
소박했던 아침 노래들을
기억할까

 

 

[현대시]
 
초승달을 잡으러 간 누이
이복현
 
 

속눈썹 고운 어린 누이가
눈싸움을 거는 밤
소슬바람에 떨어져나간
그 눈썹이
은하 흰 물굽이를 타고 흐른다
발을 동동대며 쫓아가는 누이
맑은 울음소리가
푸른 하늘 끝으로 명멸한다.

 

 

 

 

현대시]

 
폭설 속에서 길 잃고 싶다
이복현
 
 

네가 하나의 길이라면
나는 폭설로 지워진 그 길 위에
나그네이고 싶다

그저 한 삼 년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명상조차도 얼어붙은
만년설의 빙벽 아래
갇혀, 모든 소리와 소리
사랑의 숨결마저도 얼어붙은 그 곳에
잠들고 싶다

그대가 하나의 길이고
내가 그 길의 나그네라면 -.

 

 

[현대시]
 
목구멍 속의 새
이복현
 
 

세월 저 바깥으로
지친 목숨을 실어 나르는 한 조각 구름
힘겹게 구름마차를 끌고 가는
수만 마리의 푸르고 투명한 말들

낮에는
깨진 거울조각 같은 하현달이
지나간 생을 비추어 주고
밤이면 마음의 중심에서 울고 있는
소쩍새 한 마리
절망의 살점을 찍어 올린다

아, 날이 새도록 울어도
언제나 똑같은 떨림으로 복받쳐 오는
저 깊은 목구멍 속의 새
충혈된 울대를 갖고 살아가는
한 마리의 새
겨울이 저물어도
새는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현대시]
 
내 마음은 소낙비를 기다리고 있다
이복현
 
 

지상의 눈물이 다하고
슬픔의 강도 말라버린 사막 - 그 곳에
목마름 적셔 줄 샘을 찾아 헤매는
대상처럼, 낙타처럼
내 마음은 소낙비를 기다리고 있다

밤이면 별을 따라
야수와 전갈이 득실거리는
대 평원을 가로질러 가는
대상처럼,
지친 낙타처럼 …,

 

 

 

[현대시]
 
뿌리의 말
이복현
 
 

바람에 쫒겨 온 낙엽이
상처 진 알몸으로
불거진 나무뿌리를 감싸안아 준다

뿌리가 말했다

"고맙구나
너의 아픔으로 나의 시려움을 덮어주다니!
네 몸의 구멍난 상처 사이로
마알간 하늘이 보이는구나
상처가 하늘만큼이나 맑구나!"

 

 

 

[현대시]
 
서투른 사랑을 위하여
이복현
 
 

이방인처럼 너에게 다가간다
서투른 고백, 서투른 몸짓으로
목마르게 너를 부른다

진실은 조금 서투르다는 걸
너도 알지?

거짓은 얼마나 완벽한 미소로서
너를 점령하고
쓰러뜨리는지

언젠가는 너도 알게 될 테지만
오, 그 땐 이미
태양은 우리를 비추지 않으리

아마존 푸른 강도
우리들 심장을 흐르지 않으리.

 

[현대시]
 
눈물, 그리고 바다
이복현
 
 

내 영혼이 목마름에
사막 한가운데 쓰러져 있을 때
별들은 따뜻한 눈물로
나를 적셔 주었네

누가 이 열사熱沙의 세상에서,
나에게 달콤한 기쁨이 되겠는가
목마름을 적셔 줄 마지막 한 방울
눈물이 되겠는가

오, 세상 모든 이의 눈물이 모여
골짜기를 흐르는 시내가 되고
여러 줄기의 시내가 모여
푸르고 깊은
강이 되어 흐를 때
우리들 인생도 눈물 위에 떠서
헤아릴 수 없는 바다,
끝 모를 수평선을 향해 간다네.

 

[현대시]
 
가을의 서書
이복현
 
 

먼 하늘에 흰 구름
날아간 새 - 보이지 않는다
산은 붉게 물들고 바람이 인다
내게 부는 이 바람은
어디 사는 그 누가 보내온
서글픈 사연인가

가슴 저미는 그리움처럼
못다 읽고 닫아버린 슬픈 편지처럼
내 마음에 쓰여지는 가을 바람이여!
불붙인 가슴도 식어 가는 산
조금씩 조금씩
자기를 비워 가는 비탈의 나무
하얀 겨울을 기다리는 짐승들
젖가슴을 파고들듯이
어머니인 대지의 가슴팍을 후비고 든다

오, 마른 낙엽처럼 인생도 시들어
떨어진 꿈들이 바람에 불린다
화려한 치장의 옷 벗고서야 비로서
정갈해진 숲
자신을 남김 없이 내어 버렸을 때
환해지는 세상

나무와 풀 사이로
푸른 하늘이 스며든다
깨끗한 영혼의 한 페이지처럼
맑게 펼쳐진 하늘 깊숙이
오랫동안 감춰 놓은 미발표의 시를
적어 내려가듯
잎을 떨구어 낸 나뭇가지가
조용히 빈손을 흔들고 있다.

 

[현대시]
 
바이올린
이복현
 
 

누가 어둠 속에서
가난한 영혼의 혼줄을 고르고 있나

팽팽한 침묵을 깨고 날아 와
사유의 살 속으로 저며드는 고음 하나
칼날 같이
떨리는 가슴을 도려낸다

호두처럼 단단한 껍질을 깨뜨리고
잃어버린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준다

반짝이는 은유 하나
환한 빛 속으로 날려보낸다
아프게 날개를 퍼덕일 때
어두운 혼 속으로
푸른 물결이 밀려든다

하늘이 넓은 가슴을 열어
환한 미소를 머금고
영혼의 광장으로 달려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