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문학의 즐거움]

현대시(제6목록-12편)

로뎀추리 2009. 9. 1. 14:26

[현대시]
 
못에 관하여
이복현
 
 

벽은 알고 있다
냉혹한 가슴에 단단히 부리 박혀
녹슬어 가는 못의 고뇌를,
기달미에 지쳐 마침내 산화하고 마는
자황빛 슬픔을

벽은 알고 있다
침묵은 얼마나 단단한 이빨로
아픔을 꼬옥 깨물 수 있는가를 …

 

[현대시]
 
가난한 숲을 위하여
이복현
 
 

아플수록 살랑거리며
  더 푸르게, 더 밝게 웃음 짓는
    풀꽃들

절망을 떨치고
  슬픔을 지우고
    우리도 한번 큰 소리로
      웃어보자고 - 하 하 하 하

비 젖은 가슴을 털고
일어서는 나무처럼,
그늘진 숲 속에 불을 밝히는
작은 풀꽃처럼
남 몰래 키워온 꽃 대공 위로
환한 미소 한 송이
피워내자구 -

 

 

[현대시]
 
고삿길
이복현
 
 

한 아낙이
아무도 없는 새벽 샘에 나와
물 속에 빠진 황금별 하나를
빈 동이에 길어 담아
달빛 푸른 고삿길을 출렁이며 가고 있다

내 생의 희미한 고삿길을 밝혀주던
사유의 별 하나
지금도
그 아낙의 새벽 물동이에 갇혀
내 안의 어두움을 비쳐주고 있다.

 

[현대시]
 
따뜻한 사랑 한 그릇
이복현
 
 

지금도 군불 지핀 아랫목에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 한 그릇
홑이불에 싸여 있을까

놋주발에 담긴, 뜨거운
흰쌀밥 한 그릇

칼바람이 문풍지를 울리는 겨울 밤
늦은 귀가의 아들을 기다려
빛나는 놋주발에
젖은 손으로 꼭꼭 눌러 담은
고봉 쌀밥 한 그릇

정작 당신은 식구 많은 종갓집
양식 걱정에
물불은 보리누룽지 몇 술로
허기 겨우 때우시던
어머니
그 체온 같은
사랑 한 그릇
지금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현대시]
 
탄생
이복현
 
 

사막에 떨어진 한 알의 씨앗이
천근 모래더미를 가슴으로 밀치며
연약한 무릎을 펴
일어선다

폭풍우와 태양의 입맞춤을 두려워 않는
탄생의 위대함 앞에
박수를 보내는 사막의 나비
축가를 부르는 사막의 새들

 

 

[현대시]
 
첫사랑
이복현
 
 

봄이
연둣빛 입술을 들고 와
폐허에 입 맞출 때
메마른 가슴에서 솟아난
푸른 싹 하나!

초록물결 넘실대는 밀밭 길을
더듬어 가고 있는
아련한 청춘의 푸른 기억 속으로
가슴 설레던 그 날의 연서를
입에 물고
푸르륵
종달새 한 마리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현대시]
 
열리지 않는 문안에 내가 있다
이복현
 
 

나에게로 들어오는 문은
굳게 닫혀 있다

너에게만
몸의 열쇠를 주겠다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유리창에는
회색 블라인드가 처져 있지만
어둠 속에 웅크린 그리움은
투과된 빛 속에서 눈뜬다

나는 너를 내 가슴에 초대해 놓고도
아무 말하지 못한다

이 시간을
침묵으로 끝낼 수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해는 기울고
너는
서서히 지워져 가는 나를
안타까이 바라본다

노을은 비단처럼 후미진 마음을 적시고
침묵 속에서
우리들의 운명은 익어간다
존재의 허상 속에 갇혀 있던
빛이 사라짐으로
슬픈 그림자도 자취를 감춘다

나는
어둠 속에서, 가만히
갈비뼈 밑으로 손을 넣어
아물어 가는 상처를 만져본다
쓰라림은 늘
내 안에서 시작되건만
나는 그걸 깨닫지 못한다

문은 다시 잠겼다
나는 나를 더 이상
내 안에 가두고 싶지 않다
용기를 얻기 위해선
기다림이 필요함을 알아
더 이상 잠기지 않는 문이
바람에 삐걱거릴 때까지
그리하여, 누군가가
다시 나를 찾을 때까지
기다려
그는 나의 구원자가 되어
나를 소유하게 될 것이며
나는 그의 안에 깃드는
바람이 될 것이다
그의 왕국을 다스리는 왕,
왕이 될 것이다.

 

[현대시]
 
구름
이복현
 
 

새떼들 흘리고 간 하얀 속 깃털
저마저 사라져 버리면
누가 흰 새를 기억할까

누가
애환의 울음과 웃음을 복사하여
가슴 깊숙이 품고
지워진 기억의 틈새를 날아간
한 마리 구관조를 기억할까

 

 

[현대시]
 
아침
이복현
 
 


지금 
어느 푸른 해역을 
지느러미 치며 가고 있을 
내 은빛 물고기여―

멍든 바다의 가슴 위로 돋아난 
칼날 같은 비늘을 뚫고
지친 아가미를 활짝 벌려
거친 숨 몰아쉬며 달려가고 있을 
날렵한 등줄기 
푸르고 눈부신 유영이여―

 

[현대시]
 
몽상의 편지
이복현
 
 


우체국 없는 나라에서
수신인 없는 편지를 부친다
봉투 속에는 
검고 딱딱한 씨알들을 담는다
숨소리 깊은 내 마음이다

누군가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사람이
내 편지를 열어 보았을 때
우산 없이 길을 나선 
그 봄날의 한 날처럼 
축축한 생의 모퉁이를 걸어오다가 
가랑비 젖은 가슴에 
봄을 심어 줄 꽃씨 몇 낱
쏟아져 나오면
그의 세상은 필시 
꽃처럼 환해질 것이라 믿으며
그리움에 우표를 붙인다

서늘한 저녁바람이
유리창을 흔들어대면
골목길을 비추는 
가로등 같은 한 사람이 
불빛 젖은 커튼을 걷고 
마음의 창을 열어
고요한 천상의 수면 위에 수놓은 
그리움을 가만히 올려다보며 
그 녹슬지 않는 사랑의 불빛들을 
꽃씨처럼 가슴에 간직할 것이기에,

나는 
우체국이 없는 나라 
수신인 없는 편지를 부친다
세월에 할퀸 사내의 
덜컹거리는 가슴에서도 
봄을 기다리는 숨소리를 들을 수 있음을 
알리고 싶어서,

현대시]

 
고니
이복현
 
 


물 한 모금 마시고 우러르는 하늘엔 
빛 바랜 가을엽서가 
길이 먼 강 목선처럼 떠 있는데
흐름이 깊을수록 
쓸쓸하지 않게
헤엄치는 법을 배워 둬야지

이런 날에 나는
한 마리 고니
펜의 촉 같은 부리로 
물위에 시를 쓴다
간혹, 물고기들도 
내 시를 읽을 수 있도록,

나는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 앞을 
옆모습을 남기며 지나간다 
그들의 가슴 속 고요한 수면 위에 
지울 수 없는 파문을 새기며

까칠한 손이 가슴을 스칠 때
몸의 가장 따뜻한 곳 
깃털 하나 뽑혀
수면 위로 떨어진다

그 깃털, 맑게 닦은 하늘에
새털구름으로 흐르는 걸 본다

가벼운 목숨의 한 정표다
곧 사라지고 말 흔적이다

나는 믿지 않는다 
사랑이 영원하리라는 그 말
깃털 같은 그 언약을,

 

 

[현대시]
 
빈센트 반 고흐의 과수밭
이복현
 
 

빈센트 반 고흐의 과수밭



빈센트 반 고흐의 과수밭 과수나무는 
라면가락 같은 아지랑이를 먹고 자란다
마치, 아기기린이 
벼랑으로 뻗어 가는 칡순을
돋음발로 뜯어먹듯
아지랑이를 뜯어먹고 자란다
땅속 깊은 곳에서 
대지의 땀구멍을 빠져 나온 
비단실 같은 아지랑이를,

빈센트 반 고흐의 과수밭에는 
19세기 중엽에 떠오른 태양이 
아직도 지지 않은 채 
과수밭 한 쪽을 비쳐주고 있다

빈센트 반 고흐의 과수밭에는 
아지랑이를 먹고 자란 과수나무가 
더 큰 아지랑이가 되고 싶어서 
꾸불꾸불 하늘로 올라갈 때
줄을 지어 승천하는 과수나무 사이로
밀짚모자를 쓴 한 아가씨가 
무지개사다리를 밟고 하늘복판으로
올라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