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문학의 즐거움]

현대시(제10목록-12편)

로뎀추리 2009. 9. 1. 14:45

[현대시]
 
첫 눈(眼)에 빠지다
이복현
 
 

마주하는, 순간
모든 것은 완성되었다.
말 없이도 서로를 읽을 수 있는
순전(純全)한 눈 속에서,

별이 먹구름 속에서도 녹슬지 않고
맑은 날 저녁, 검은 융단 위로
제 모습을 드러내듯이
늘 서로의 거울에 비추인
나르시스, 나르시스에 대한 신념으로
두레박이 닿지 못할 깊이의
우물에 빠지거나
혹 호수의 밑바닥으로 내려오듯이
온 몸을 던져
서로의 포로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돌기로 합류하여
즐거운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비록, 바다에 이르는 길은 아득하지만
늘 오늘을 생각하며 철석이기 위해
알지 못 할 순간에 스쳐 간
작고 소중한 기억들을 일깨우며
죽음을 넘어서서 영원할 것이다
꽃은 이미 웃음으로
우호의 인사를 건내고 있듯이
설명할 수 없는 낱말들로 가득한 가슴
침묵의 한가운데 서서
지그시 바라봄 만으로
영혼의 혈관을 흐르는 流速은
맑은 목소리를 내며
기나긴 계곡을 점령하고
아름다운 신세계를 향하여 간다.

수평선을 향해 하얀 돛을 펴 올린
작은 돛단배 처럼,
그렇게 순결한
부활의 꿈을 싣고 흘러갈 것이다.
첫눈에,

 

 

[현대시]
 
등대
이복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맨 처음의 그 자리
그 길목을 지키고 있으리라

마음 깊은 유전(油田)에서
기름을 끌어올려
그대를 지켜 볼
작은 등불 하나 밝혀 들고
밤 마다 그 바닷가에 나가
애무하는 물결 속에 종아리를 담그고 서서
먼 南國으로부터 밀려오는 그대의
숨소리를 들으며
오래도록 기다리리라

다리가 다 삭아버렸을 때,
기름이 다하고 불빛 희미할 때
어떤가? 혹, 업겁 후의 머언 먼 날이면,
어느 날, 문득
밤의 수평선을 열고
그대를 다시 만날 때
야윈 어깨 위로 백발이 흘러내리고
먼 발치에서 어떤 사람이
밤하늘 높이 축포를 쏘아올릴 것이니
환하게 쏟아져내릴 무수한
별들의 눈동자를 맞이하며
환호의 박수소리와 뒤섞이는 바다의
숨 가쁜 하얀 간음에
몸과 마음이 혼곤하게 젖는
감미로운 밀월이 있으리라
분명
그러한 밤이 오고 말리라.

 

[현대시]
 
등대
이복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맨 처음의 그 자리
그 길목을 지키고 있으리라

마음 깊은 유전(油田)에서
기름을 끌어올려
그대를 지켜 볼
작은 등불 하나 밝혀 들고
밤 마다 그 바닷가에 나가
애무하는 물결 속에 종아리를 담그고 서서
먼 南國으로부터 밀려오는 그대의
숨소리를 들으며
오래도록 기다리리라

다리가 다 삭아버렸을 때,
기름이 다하고 불빛 희미할 때
어떤가? 혹, 업겁 후의 머언 먼 날이면,
어느 날, 문득
밤의 수평선을 열고
그대를 다시 만날 때
야윈 어깨 위로 백발이 흘러내리고
먼 발치에서 어떤 사람이
밤하늘 높이 축포를 쏘아올릴 것이니
환하게 쏟아져내릴 무수한
별들의 눈동자를 맞이하며
환호의 박수소리와 뒤섞이는 바다의
숨 가쁜 하얀 간음에
몸과 마음이 혼곤하게 젖는
감미로운 밀월이 있으리라
분명
그러한 밤이 오고 말리라.

 

 

[현대시]
 
별을 그리워하는 또 다른 별
이복현
 
 

빈혈을 앓는 낮달 하나가
철조망 너머에 갇혀 있다.
거룩한 기도조차 닿지를 않는
저 하늘, 북극성은
어느 별인가?

낮달이 점점 야위어지면서
그리운 별들이 눈 떠 올 때에
별을 그리는 또 다른 별들이
하늘 가운데로 다리를 놓는다
저 다리, 언제나 강을 건널까?

철조망을 꿰어서
찬바람이 불어 온다
마주 보는 눈동자가 서럽다.

 

 

[현대시]
 
풀씨를 심는 하늬바람
이복현
 
 

하늘이 들앉어도
가슴은 늘 비어 있다
폐허에 뿌리를 둔
욕망의 줄기 마다
단단한 이마빡 위로
엽록의 뿔을 단다
훵한 가슴 파고 들어
젖꼭지를 물던 것이
잎 벗은 꽃자리에
아픔으로 일어서서
가파른 벼랑 끝 마다
풀씨 하나씩 심고 간다

 

[현대시]
 
낙엽의 길
이복현
 
 

내 마음 실어 갈 산바람도 고운 바람
저리 푸른 하늘길에 노자 없이 가는 여행
내딛는 발자국 마다 깃털처럼 뜨는구나

높가지에 머물러 화답하던 푸른 날엔
빗줄기에 젖어도 보고 바람결에 설레도 보고
기쁨과 서러움 버무려 꽃으로만 피웠더니

깃발로 펄럭이던 그 열망의 푸르름도
오늘은 청자빛 하늘로나 개워 두고
날아라 마지막 사념, 나 하나로 돌아가.

 

 

[현대시]
 
희망
이복현
 
 

폐허의 하늘에도
별은 뜬다
폭풍이 지나간 벌판에도
새들은 날아들 것이며
부러진 나무가지 끝에서도
새 움은 다시
돋아날 것이다

밤 깊은 가슴에도
아직
스스로를 몸 밝힐 촛불 하나는
남아 있다

어둠 속에 살아있는 마지막 불씨처럼
얼어붙은 내 혈관에
뜨거운 피 풀어놓기 위해
최후의 발화를 꿈꾸는 성냥알
한 개피는
언제나 남아 있다

꺼져가는 불빛 속에
차고 푸른 세상의
못다 쓴 일기를 들여다보며
지상에서의
마지막 사랑을 덥혀 줄
따뜻한 눈물 한 방울은 언제라도

내 안의 샘에 남아 있다

 

[현대시]
 
그리운 둥지
이복현
 
 

날개를 다친 새 한 마리
어둠에 젖은 빈 들을 가로질러
미루나무 둥지를 찾아간다

언제나 기다려 주는 둥지임을 알지만
새를 인도 해 줄 빛 한줄기,
새를 데려다 줄 바람 한 점 없는
허허로운 벌판에서
감꽃으로 피는 별 마다에
눈물을 매어달며

새는 그래도
늘 부르던 그 노래를
잊지 않습니다
깊은 어둠, 상한 날개
길은 멀어도
둥지를 찾아 가는 새의 노래는
끝이 없습니다

 

[현대시]
 
동화사 가는 길
이복현
 
 

이 겨울
한 남자의 가슴 위로
동백꽃이 진다
말하지 않아도 나는 안다
침묵하는 숲의 슬픔을,

누군가
눈 쌓인 비탈길을
혼자 걸어 간
발자국이 보인다
발자국 하나 하나에
쓸쓸함이 화석처럼 박혀 있다.

 

 

[현대시]
 
江의 슬픔
이복현
 
 

사는 동안의 그리움을
산그림자로 가슴에 묻고
아프게 흔들리는
강의 슬픔

경건한 기도처럼 침묵을 끌고 가는
머나먼 로정 위로
한 조각 구름이 길벗 되어
동행을 한다

마음 속
어둠에 젖은 강 하나 흘려보내고 나면
또 다른 은빛 강이
추억의 푸른 들을 굽이쳐 온다

오랜 세월을 강이 되어 흐르다 보니
나도 이제 웬만큼은 알 듯 하다

누구나
가슴 속 광활한 평원에는
침묵하는 강이 있어

아무 말 하지 않고도
참으로 많은 말 하고 남는
푸른 길이 있다는 것을,
아프게 흔들리는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현대시]
 
겨울의 묵상
이복현
 
 

동구 밖 느티나무에
눈 먼 새 한 마리 앉아 있다
깃털이 바람에 쏠리운다
기다림은 아름답지만
또한 손시렵다는 것을
새들도 이제는 잘 알고 있다

바람이 불면
떠나지 못 하는 마음들은
정류장 근처를 서성이다가
낯선 고장에서 잠이 들고
날이 저물기 전
서둘러 길을 떠난 사람들도
지고가던 봇짐을 풀어
구름 위에 먼저 실어보내고
빈 손으로 강을 건넌다

봇짐을 벗은 나그네처럼
마음을 비우면 몸도 가벼운데
삶은 왜 가벼움을 버리고서, 한사코
서로를 무겁게 업고 가는 것일까?
눈내리는 겨울의 한 복판을
걸어가며 생각한다.

 

[현대시]
 
너를 위해 비워 둔 의자
이복현
 
 

기다림이 하도 오래어서
몸의 구석 구석에 녹이 슬었다

가늠할 수 없는 적막 깊이
이룰 수 없는 꿈부스러기들,
빈 가슴 가득히 쌓인 먼지를,
그리고
낙엽이 쌓여가는 공원 한 구석을
지키고 있는 빛 바랜 벤치를
어찌 다 기억하겠는가만
마음에도 이제 해 질 때가 된 것인지
풀벌레가 서러움을 풀어 놓는다
하루 하루를 늘상
구름으로 흐르면서
어찌
어둠이 앉았다 떠난 자리
지친 별빛을 다
헤아릴 수 있을까만은
누군가
어두운 가슴에 횃불을 켜 드는
손이 있다는 걸 알고 있지
타다가 꺼져버린 숨 막히는 순간에도

늘 너를 위해 남겨 둔
빈 자리 하나
돌아오라고, 언제까지나 가슴 한켠에
너를 위해 비워 둔
의자 하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