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문학의 즐거움]

현대시조(제1목록-24편)

로뎀추리 2009. 9. 1. 15:50

[현대시조]
 
모내기
이복현
 
 

비록 좁은 모판에서 꿈을 틔워 자랐지만
이 남루 모두 벗고 포기 포기 몸을 세워
온 들을
푸르게 적실
희망으로 넘친다

철철이 다진 의지
알알이 영글리라는
고운 꿈에 줄을 띄워
고르게도 심어 간다
어느 날
금관을 쓰고
겸허히 서리라며,

 

 

[현대시조]
 
그리운 폐원廢院
이복현
 
 

순례의 길가에 폐원 하나 있다
비 젖은 나그네가 잠시 쉬어 가는,
말없이 천년을 견딘 묵언의 성자 같은,

오래 닫힌 그 문 열고 녹슨 시간 꺼내 본다
삐그덕거리는 틈 사이로 환한 빛살이 새어 들 때
아프게 쏟아져 내린 꿈비늘을 만져 본다

 

[현대시조]
 
내 생의 어느 한 쪽을
이복현
 
 

가슴 깊은 곳에 밝혀 둔 촛불 하나
창호지 문살마다 환하게 젖어 든다
타다가
지친 자리가
어룽지는 눈물로

내 생의 어느 한 쪽을
그대 위해 남길까

이 한 몸 다 녹여서
어둠을 씻어 내면
목숨의
하얀 뿌리를
만져 볼 수 있을까

 

 

[현대시조]
 
벌레집
이복현
 
 

가을이 채 가기 전
떨어질 잎들 위에
내일을 설계하며
집을 짓는 벌레들
다가올
추락 위에도
꿈기둥을 세운다

땀과 믿음이 허사가 된다 해도
바람에 끌려가다 시련 끝에 닿을 봄
거기서
다시 태어날
운명의 순응자로,

 

 

[현대시조]
 
선물
이복현
 
 

내가
내가 너에게
무엇인가 좋은 것 한 가지를
주고 싶고 또한
줄 수 있다면
영롱한,
물푸레 푸른
눈물 같은 슬픔을 주리

천년 가도 녹슬지 않는
별과 같은 사랑을
가슴에 브로치로 달아 주고 싶어
영원히 꺼지지 않을
네 혼 속의 등불로,

 

 

[현대시조]
 

이복현
 
 

깊이 잠든 세상을
       깨울 수만 있다면
모질게 나를 쳐서
       뼛속 울음 꺼내어
귀먹은 땅과 하늘을
       뒤흔들어 울려다오

 

 

[현대시조]
 
바다 사랑
이복현
 
 

억만 년을 울어도 지치지 않는 사랑
살점이 다 찢기고 피멍이 들도록
온몸을 내어 던지며 애구하는 저 호소

손톱이 다 헐어서 물거품이 되도록
해안을 쥐어뜯으며 울부짖는 절규
언제나 멈출 것인가
끝이 없는 그리움

때로는 잠든 사이 뭇 별들이 내려와
멍든 가슴을 쓸어주고 돌아가도 모른 바다
언제나 이룰 것인가
영겁의 짝사랑

 

[현대시조]
 
경덕정에서
이복현
 
 

두문동 들앉아서 불출을 선언하니
수목이 푸르거든 마음 또한 안 푸르랴
백학이 나래 편 곳에
가슴 씻는 개울소리

모랫골 솔숲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하는 구름
부귀 명예도 저만치 부운과 같도다
내 생애
곧고 푸름만
한 가슴에 실으리라

 

 

[현대시조]
 
아파트 창을 열면
이복현
 
 

지나가던 조각달이 베란다를 넘어 들고
어린 별이 내려와 무릎을 베고 눕네
그윽한 눈동자 속에
흰 들꽃이 피는 밤

 

[현대시조]
 
을숙도 해돋이
이복현
 
 

뜨거운 손이 있다
수평선에 꽃불 지핀,

아프다
그물에 걸려 파닥이는 고기비늘
물새도 눈이 멀어서
섬 기슭을 떠돈다

해 돋는 바닷가를 맨발로 걷는다
온 하늘 온 바다가 뜨겁게 달아올라
마음도
화목火木이 되어
타오르는 불이다

[현대시조]
 
맨드라미 핀 하늘
이복현
 
 

노을이 가만 가만 빈 잔을 채워오는
이른 저녁 창가에 하늘 마주 앉으면
자줏빛 어깨 너머로
출렁이는 파도소리

용마勇馬한 필 목을 빼고
먼 하늘을 응시한다
긴 울음 갈기를 세워
고삐 끊고 달아날 듯
적토마
붉은 덜미에
명주하늘이 휘감긴다

 

 

현대시조]

 
한탄강
이복현
 
 

무수한 계곡을 몸 부시게 흘러 와서
세상사 다 겪은 듯
넉넉한 표정이다
이승의
구비마다에
새 노래를 심으며,

욕된 나날 건너서
저 피안에 이르면
흰 들꽃 자욱한 그 마을이 보일까
목메어
부르던 이름
그 언덕에 있을까

 

[현대시조]
 
그 유기범은 누굴까
이복현
 
 

아직도 살아 있다는 그 사실이 신기하다
한낮 큰길 모퉁이서 신음하고 있는
내장이 쏟아져 나온
텔레비전 한 대

 

 

[현대시조]
 
겨울 아침
이복현
 
 

성애진 한 세상을 입김 불어 닦다 보면
화려한 날빛이 창안으로 달려와서
어두운 세상을 열고
무지개를 세운다.

 

 

[현대시조]
 
겨울벌판에서
이복현
 
 

마른 풀잎 사이로 칼바람이 불고 있다
헐벗은 나무 위에 흔들리는 새집 하나
바람을 부둥켜안고 목 메어 흐느낀다

눈밭에 등을 대고 얼어 죽은 새 한 마리
열린 부리 굳은 혀로 잿빛 하늘을 닦아낸다
들뜬 눈 식은 동자에 어린 별이 뜨는 저녁

 

 

[현대시조]
 
꽃상여
이복현
 
 

북망도 구비 구비 이 산길 같다던가
꽃상여 개울 건너 갈바윗골 지나가네
띠 푸른
양지녘으로
하늘길로 훤하여라

명정이 펄럭이면 혼백도 돌아서서
바람에 옷고름 날리며 저만치 울고 가네
어어여 어여이어여
멀고 먼 길 혼자서 가네

앞소리가 부르면 요령도 함게 울어
서러운 곡소리는 구비 구비 강이어라
저승길
험한 길에도
진달래는 피었을까

 

[현대시조]
 
망향의 언덕에서
이복현
 
 

이마를 짚고 가는 늦가을 산바람이
멀고도 아득한 북향 길을 열어 뵌다
저 언덕
푸른 꿈자리
그 언제나 안겨 볼까

저 금기의 북녘 땅을 고개 들고 뻗어 가는
반세기도 더 묵은 칡넝쿨을 보는가
철조망
가시울타리
타고 넘는 그리움을,

눈가에 푸른 열매 금빛으로 열리는 날
동토도 문을 열고 뜨락에 닿으리니
아직은
따스한 그 손
만져 볼 수 있으려나

 

 

[현대시조]
 
따뜻한 슬픔
이복현
 
 

누가 열어 놓은 뜨거운 온천순가
가슴에서 솟구치는 따뜻한 눈물줄기
세진에 얼룩진 마음을 개운하게 씻어 준다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눈물 마른 불명조는
슬픔이 얼마만큼 따뜻한지
알고 있다

저 환한 햇빛 속에선
슬픔도 꽃이 됨을,

 

 

[현대시조]
 
비자나무에 걸어 두고 온 노래
이복현
 
 

우거진 숲 사이로 이슬길 밟아 갈 때
백양사 쌍계류 귀를 트는 물소리
때묻은 영혼을 씻어
천길 벼랑에 던진다

산산이 깨어져 울던 그 날의 목소리
비자나무 가지마다 나부끼던 노래
봄이면
응혈진 핏줄을 뚫어
푸른 꿈을 피우리라

 

 

현대시조]

 
거룩한 성자
이복현
 
 

버림받은 것들을 받아 주는 쓰레기통
짓밟히고 나뒹굴던 아픔 하나 하나
눈물로 어룽진 삶을
품에 안고 침묵한다

어제나 있어야 할 곳 가까이 다가앉아
더러움을 쓸어 담고 뚜껑을 덮는다
상처진 쪼가리들을
끌어안고 아파한다

 

 

[현대시조]
 
모자이크
이복현
 
 

나뒹굴던 아픔들을 한 자락에 품는다
흩어진 바램들을 하나로 엮어 간다
수많은
조각이 모여
피워 낸 꽃 한송이

무욕의 바탕 위에 깨어진 진실 이어
차츰 밝아오는 마음 속 세선 하나
상처진
꿈들이 모여
이루어 낸 푸른 길

 

[현대시조]
 
여치
자화상
이복현
 
 

풀빛 눈동자에 복사꽃이 지고
창백한 서러움이 강물로 흐르면
올 고운
목소리 놓아
밤 깊도록 운다

풀숲에 누워서
별 총총한 하늘 본다
돌아보면 바람 같은 집시의 나날들
어둠을 불사르던 가슴
재가 되어 날린다

물거울에 흔들리는
달, 구름, 별 사이에
헝클어진 내 모습이 떠돌이로 박혀 있다
하늘은
청잣빛 사랑
늘 변함이 없건만,

 

[현대시조]
 
옥잠화를 보며
이복현
 
 

양반집 규수 한 분 몸뜰로 나신다
옥비녀 살짝 꽃은 뒤태 고운 낭자머리
담 넘은 산들바람이 옷고름을 당긴다

앞가슴이 열리면서 미동을 할 때마다
폴폴 날리는 살내음에 혼절할 것 같은데
옥잠화, 그 맑은 눈빛이
내 발길을 붙잡네

심술궂은 봄바람이 치마폭을 살짝 걷어
희고 맑은 속살이 환히 드러날 때면
아찔한 현기증으로 한 목숨이 무너진다

 

 

[현대시조]
 
낙엽의 길
이복현
 
 

내 마음 실어 갈 산바람도 고운 바람
저리 푸른 하늘 길에 노자 없이 가는 여행
내딛는 발자국마다 깃털처럼 뜨는구나

높가지에 머물러 화답하던 푸른 날엔
빗줄기에 젖어도 보고 바람결에 설레도 보고
기쁨과 서러움 버무려 꽃으로만 피웠더니

깃발로 펄럭이던 그 열망의 푸르름도
오늘은 청잣빛 하늘로나 게워 두고
날아라 마지막 사념 나 하나로 돌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