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발자국(발표)

등단작품, 신문 및 문예지 발표, 시집(일부) / 이복현

로뎀추리 2017. 8. 9. 13:38




   

 

 

작품 파일 / 이복현

 

 


 

 

1. [등단작품]

 

 


 

 

별을 그리워하는 또 다른 별      (*문예사조 1994. 11월호 -시 부문, 신인상)

빈혈을 앓는 낮달 하나가

철조망 너머에 갇혀 있다.

 

거룩한 기도조차 닿지를 않는

저 하늘, 북극성은 어느 별인가?

 

낮달이 점점 야위어지면서

그리운 별들이 눈 떠 올 때에

별을 그리는 또 다른 별들이

하늘 가운데로 다리를 놓는다.

 

저 다리, 언제나 강을 건널까?

 

철조망을 꿰어서

찬바람이 불어온다.

 

마주 보는 눈동자가 서럽다.

 

 

 

 

 

 

 

 

 

 

 

광화문(光化門)          (중앙일보 1994. 10. 24. )

 




 

 

1. 닫힌 마음 문을 열면 눈물 고이는 하늘 뵌다.

 

   질 고운 청자하늘 머리에 인 저 광화문

 

  이끼 진 용마루 끝에 가을빛이 눈부시다.

 

 

2. 한 왕조 품어 안은 아미산을 등에 업고

 

  빛나는 아침 해를 가슴으로 받아 안아

 

  육백 년 한을 접어서 침묵으로 앉았다.

 

 

3. 임진년 그 수난을 아리게 여며 안고

 

  타오르는 눈동자에 핏발 아직도 덜 삭아서

 

  이 가을 훤한 불길로 등줄 마다 치솟는다.


 

4. 저 부리 한을 쪼아 북악(北岳)은 눈이 먼데

 

  날 푸른 한천(寒天)을 접어 아픈 역사 헤아리며

 

  아직도 몸을 못 푼 채 슬픔을 품은 새야!

 

 

5. 오랜 세월 적막을 깨고 일어서는 까치소리

 

  문설주 돌쩌귀 마다 새긴 뜻을 찾으란다.

 

  광화문 주춧돌 마다 눈물 다져 앉는다.

 

 










 

 

하늬바람      (시조시학 1995. 상반기호 / 신인상)

 

 

하늘이 들앉아도 가슴은 늘 비어있다

폐허에 뿌리를 둔 욕망의 줄기마다

단단한 이마빡 위로 엽록(葉綠)의 뿔을 단다.

 

휑한 가슴 파고들어 젖꼭지를 물던 것이

잎 벗은 꽃자리에 아픔으로 일어서서

가파른 벼랑 끝마다

풀씨 하나씩 심고 간다.

 










 

 

2. [신문, 문예지 - 주요 발표작품]

 

 

 

 

 

자라는 돌        (중앙일보 1995. 8. 28.)

-마노원석(瑪瑙原石)

 

 

 

꿈꾸는 눈 속에

결빙(結氷)의 하늘이 있다

 

보랏빛 가슴앓이 피멍든 속살을 열고

깊고도 영롱한 슬픔이

어둠 속

꽃이 된다.

 

나도, 하나의

맑고 고운 무늬이고 싶다

 

정동(晶洞)속에 자라는 눈물의 결정체!

 

어느 날

빛나는 햇발,

 

그대 감히 눈 뜨지 못할...

 

 

 

 

 

 

 

 

 

부고 (訃告 )        (열린시학 2017. 여름)

오늘 저의 죽음을 알립니다

 

저는 정든 이 세상을 떠나

지금

지레 짐작, 몇 억 광년쯤 떨어진 여기

하늘의 외딴길 카시오페이아쯤에 와 있는 걸

전하려 합니다.

 

사랑했다고 말하려고요.

지금은 죽었지만, 살아있을 때

참 고마웠다고 말하려고요.

지나고 나니, 눈물 같은 거, 슬픔 같은 거

별거 아니라고 말하려고요.

 

그렇게 짧은 여행 동안,

너무나 쓸데없는 생각과 이기심에 억매여 잃어버린

시간들이 아쉽기만 하단 걸, 꼭 꼭 전하려고요.

 

무엇을 위해 살았다고 하지만, 결국 그 무엇이란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끝끝내 말해주려고요.

 

그렇지만 아직 사랑합니다.

사랑은 정말, 고루한 말처럼 들리지만,

수억 광년의 시공을 초월하여

여전히 내 맘 속에 남아 있으니까요.

 

당신의 눈에서 제 모습은 사라졌지만,

저는 여전히 제 혼의 혼속에서 당신을 기억하고 사랑하니깐,

당신도 반드시 저를 그렇게 사랑해 주세요.

 

안녕!

저는 이미 그대의 세상에 없기 때문에 구태여

영안실을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부의를 전하거나 조문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그대의 마음에 저를 위해 국화 한 송이 놓아주십시오.

계절이 변하여도 시들지 않는, 하얀 국화 한 송이

제 얼굴처럼 꺼내 볼 수 있는, 창백한 추억 한 송이

 

 







 

 

천 년의 그늘      (웹진-공정한시인의사회 2017. vol.21)

 



 

천 년 고목 넉넉한 그늘 아래 앉아서

천 년 전에 태어난 어린 나무 생각한다.

수많은 생멸(生滅)의 순간을 지켜본 한 증인을,

 

기나긴 세월동안 몸속에 감아 넣은

비바람은 몇이며 눈보라는 또 얼만지

몇 번의 천둥번개를 견디어 이만한지

 

큰바람 들이칠 때 길 잃은 새를 품고

폭염이 쏟아질 때 넓은 그늘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아픔을 나이테로 새겼을지

 

우러러 바라보니 의연하고 장하다

굳센 줄기 세우고 수만 가지 팔을 뻗어

견고한 뿌리 하나로 맨땅을 움켜쥔 힘!

 

 

 


 



 

 

까치밥     (유심 2015. 3)

 

 

 

하늘 높은 가지 끝에 남겨놓은 홍시(紅柿) 하나

 

엄동(嚴冬)을 녹이는 누구의 마음인가

 

뜨거운 심장 하나가

 

등불처럼 달려있다

 

 

 

구원을 실천하는 따뜻한 성찬(聖餐)이다

 

오랜 시간 지켜온 마지막 살점마저

 

배고픈 새를 위하여 내어주는 참사랑!

 

 








 

바라보다      (유심 2013. 5)

- 單首 三題 -



 


아침 강

 

일필휘지(一筆揮之), 저 초서(草書)

누구의 필법(筆法)인가!

 

휘갈겨 쓴 붓끝에서 수면 위로 튀어 오른

한 마리 황금물고기

해를 물고 솟구친다.

 

 

 

초승달

 

자루 없는 반월도(半月刀)

칼끝이 예리하다.

 

함부로 좋아하다 마음을 베였다.

 

새긴다.

그리울수록

멀리 두고 보란 말씀

 

 

 

붉은 신호등

 

너에게서 배운다.

그리움에 닿는 법을,

 

오래 서서 다리 아픈, 고단한 날들도

 

서로를 아끼는 맘으로

기다려주는 법을,

 

 




 



 

목련화   (포엠포엠 2012. 여름)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대가 켜 올린 촛불 하나하나에

이 세상 가난한 소망들을

낱낱이 피워 올려

외딴집 마당가에 두신 까닭을,

 

피워 올린 소망 하나하나가

하느님도 멀리서 볼 수 있도록

손가락 마디마다 심지를 세우신

당신의 간절한 기도였음을,

 

 

 

 


 



 

헐렁한 신발      (유심 2011. 7/8)

 

 

 

비록 낡고 해졌지만 너를 어찌 잊을까

모르는 사람들은 새 동반(同伴)을 권하지만

한 생을 온전히 바친 그 아픔을 기억한다.

 

가시밭길 진창길도 마다한적 한번 없는

무조건적 네 사랑이 나를 울린 그 날에

비포장 철벅이는 길에서 젖어 울던 생채기

 

산다는 건 이렇게나 모진 길의 원정(遠程)이요

구비마다 뼈에 닿는 모서리도 많지만은

거뜬히 한세상을 건넌 건 네 희생의 덕이로다.

 

늘 안기던 그 품이라 넉넉하고 편안함이

어머니 젖을 문 아이의 마음 같아

오늘도 먼 길 가면서 네 동행을 꿈꾼다.

 

 

 

 

 




 

 

감나무        (차령문학 2010.가을)

 

 

 

늙은 감나무 한 그루가 찬 하늘을 배경으로 검은 뼈 선명한 알몸을 드러낸 채

바람을 맞으며 서있다.

 

마지막 남은 홍시 하나를 다 쪼아 먹고 울음을 그친 새는 수운산 너머로 사라졌다.

감나무가 제 마지막 열매를 제일 높은 가지 위에 남겨 둔 까닭이 세상에서 가장

배고픈 새를 위함이었단 걸 처음 알았을 때 나는 겸손히 손 모으고 한참동안 빈

가지를 우러러 보았다.

 

가진 것 다 내어주고 빈손이지만 무척이나 환한 표정인 늙은 성자는 저녁이 되자

검붉은 노을에 에워싸였고 부활하는 예수처럼 앙상한 팔을 높이 든 채 승천하고

있었다.

 

 

 

 

 

 

      

 

 

 

 

, 내 마음의 개화(開花)        (화중련 2009. 상반기)

 

 

찬 이슬에 씻은 영혼

풀잎으로 깨어나

연초록 그리움을 꽃대로 밀어 올려

저 햇빛

화사한 꿈을

자궁 안에 품는다.

 

소낙비 씻어 흐른 내 마음의 골짜기마다

맑게 닦은 얼굴들이 귀 기울여 듣는 시간

펑 펑 펑

화포를 쏘듯

꽃망울 트는 소리

 

 

   

 

 

     

 

 

 

 

시냇물과 조약돌               (시평 2007.겨울)

 


 

조약돌의 온 몸이

 

반질반질 윤이 나면서

 

환한 기쁨으로 웃는 것은

 

순전히 시냇물의 뛰어난 성적 기교 때문이다.

 

 

 

시냇물이 밤낮 쉬임 없이

 

조약돌의 삐죽삐죽 발기한 부분부터

 

온몸을 두루 핥아줄 때

 

조약돌이 끊임없이 신음소릴 내뿜는 걸 보아서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지그시 입술을 누르는, 은밀하고 낮은

 

무아의 절정에 이르는 신음소릴 들어보면

 

그들의 밀교가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는지를

 

곧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조약돌과 시냇물이 금슬이 좋은 것도

 

비단 햇살의 축복만은 아니다.

 

불 끄고 누워서도 언제나 도란도란

 

대화를 쉬지 않는

 

끊임없는 노력과 배려에 있다.

 

 

 

지금 시냇가에 나가보시라

 

낮게 엎드려 귀를 대고

 

입안 깊숙이

 

서로의 순치(脣齒)가 부딪히는, 그들의

 

상쾌한 키스소릴 들어보시라!

 

 






 

 

새벽 종소리        (문학사상 2003. 3)

   

 

다시는 울지 말라고

널 대신해 울어주던

카랑한 목소리를 기억하는지, 기억하는지

날개에 기도를 얹어

산골마을까지 실어 나르던,

 

수많은 영혼의 눈물을 모아서

풀잎사귀 푸른 뺨에

맑은 눈동자를 매달아놓는

저리도 깨끗한 손을,

저리도 떨리는 손을... (기억하는지... 기억하는지... 기억하는지...)

 

 






 

 

낙화(洛花)         (문학사상 2001. 11)

 


 

추락은 아름답다

깃을 접는 나비처럼,

 

수평선에 가라앉는 저녁 해의 고별같이

목숨의 마지막 연소(燃燒)

뜨겁고도 붉다

 

중심이 아프다

이 선명한 증표(證票)들로,

 

타오르는 잉걸처럼

가슴을 지져댄다

 

남겨둔 피의 열매가

상처를 기념한다.

 

 

 

 

 


 



 

고목 느티나무       (현대시 2001. 4)

 

 

 

천 년을 서있어도 푸르게 깨어있어

입각성불(立覺成佛) 하고서도 아직도 침묵하는

저 고목 느티나무에

접 붙고 싶은 마음

 

한 백년도 못되어서

단 한줌 거름되어

한 평 남짓 잔디 혹은 들풀이나 키워있을

이 짧은 목숨의 여정(旅程)

겸손히 무릎 꿇다

 

천수보살 손을 뻗어 뭇 중생을 어루듯이

낮에는 지친 목숨들 감싸 안는 그늘 되고

밤에는 잠든 영혼의 넉넉한 품이 된다.

 

 

 

 

 

      

 

 

 

 

 

 

폭설 속에 길을 잃다     (문학사상 2000. 겨울)

 

 

 

몰아치는 눈발 속을 한 사내가 걸어간다.

산도들도 지워지고 하늘 길도 지워져

세상은 한 장 화선지

빈 가슴에 놓인다.

 

대 설원(大 雪原) 어디쯤

있을 듯 한 신기루

참 삶의 푯대 하나

찾아 헤매이다

폭설 속

낯선 곳에서

이승의 길을 잃다

 

목마른 사내는 허기진 걸음으로

무백(無白)의 꿈을 품고 지평선을 넘어 선다

마침내

사내마저도

지워지고 없다

 

그 누가

저 아득히

빈 세상 꿈 밭 위에

일 획(一 劃)의 뜻을 세워 한 풍경을 세우랴

뉘라서

낙관(落款)을 들어

이 순결에 놓으랴

 

그대로 둠이 좋다, 깨어남을 원치 않아

잠든 것은 잠든 대로

오래도록 쉬게 하자

영원히 못 깨어난다 해도

고요로움 그대로,

 

 

 

 


 



 

 

겨울잠을 위하여    (문학과의식 1999. 겨울)

 

 

 

꽃뱀 한 마리

찔레 덤불 사이에

똬리를 틀고 앉아 허물을 벗고 있다

산의 오래된 참나무등걸에도

껍질을 벗어놓은 애벌레들이

웅크리고 있다

 

잠자리에 들 때면 늘 갈아입곤 하는

그런 잠옷 아닌

한번 벗으면 그만인 옷

세탁도 못하고

고쳐 입을 수도 없는 옷 벗어놓은 채,

 

계절이 바뀌어도

갈아입을 옷이 없는 사람들은

찢기고 때 묻은 마음조차 벗을 데 없이

그냥 입은 동이 채로 쓰러져 잠든다.

자정 지난 서울역 지하도 콘크리트바닥에

헌 신문지 한 장 담요처럼 깔고

또 한 장은 이부자리처럼 덮고

삽날에 허리 다친 굼벵이처럼

잔뜩 웅크린 채 잠이 든,

 

언제쯤이나

이승의 허튼 욕망 죄다 벗어버리고

긴 동면을 꿈꿀 수 있을까

 

겨울잠을 위하여- 허물을 벗는

꽃뱀처럼, 벌레처럼 가벼이

땅의 옷 다

벗을 수 있을까

 

 

 

 

 





 

 

꽃이 진 자리에       (현대시 1995. 7)

 

 

 

꽃 지고 대공뿐인

헐벗음이라 해도

 

뿌리 맑게 숨겨두고

촉 틔우는 저 숨소리

 

애달픈

기다림 끝에

젖니 하나 돋는다.

 

 

창가에 앉혀두고

날마다 물을 주고

 

결 고운 햇살바지

다순 마음 보태노니

 

저 대공

푸르른 끝자리

촉불 하나 못 밝힐까

 

 

 

 

 

 

 


 

 

 

5, 망월동      (시조시학  2013. 여름)

     

 

오래 전에 죽은 혼이 새싹으로 돋아나

억울한 사연들을 새소리로 불러놓고

망월동 흙무덤 마다 제비꽃을 피웠다.

 

푸른 사랑 어디 두고 피 묻은 탄환(彈丸)들만

펑 펑 펑  가슴을 뚫어 온 세상이 꽃인가

뻥 뚫린 탄흔(彈痕)이 깊은 심장마다 꽃인가!

 

바람도 길을 잃고 흔들리며 걷는 거리

금남로 피 향기가 망월동산 다 덮었다.

오늘에 누가 운다고 저 궁창(穹蒼)이 푸른가!  

 

 

 

     

 

 

 

 

 

 

가을 산에서      (시조시학 2011. 겨울호  /  2012.  11회  시조시학상  수상작)

 

  

   

마음 먼저 달려가 물드는 그 곳에

오랫동안 숨겨놓은 가을 산이 있었네.

뼛속에 새긴 문신을 아름답단 사람들

아무도 그 속내를 눈치 채지 못하네     

고운 줄만 알고 있는 저리 붉은 꽃빛일랑

피멍든 가슴을 짜낸

뼈아픈 울음임을,

 

곧 닥쳐올 시련을 견뎌내기 위하여

고통스런 탈육(脫肉)을 감내하고 있는

마지막 제의(祭儀)인줄을

눈치 채지 못하네.

안으로 가슴조이며 타오르던 불꽃도

시나브로 시들어 꽃비 되어 날리네.

투명한 거울 속처럼 풍경이 살아나네.

 

살붙이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어미 슬픈 이별처럼 몸을 떨며 팔을 뻗는

빳빳한 나무의 혼절에 쏟아지는 붉은 빛

전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학도병처럼

메인 울음 삼키며 뒤돌아보는 눈들

언젠가 잎 진 그 자리 새 움으로 돋으리.

 

살아있는 매듭마다 핏줄이 뻗어 돌고

가지마다 푸른 기운 움터오를 때에

알리라

아픔이었음을,

그 역시 살을 뚫는...

 

젠가는 또 다시 만나 볼 수 있으리

가진 것 다 내려놓고 빈손에 빈손으로

정다운 이웃이 되어

손을 건네 잡는 걸,


 

 

 

 

 

 

 

3, [시집 ] 따뜻한 사랑 한 그릇 (도서출판 다층, 1999. 대산창작기금 )

                            -이하, 시집 수록작품 일부-

 

  


 

 

서시(序詩)

            - 에게

    


 

내가 너를 애인 삼기 전에

너는 이미

나의 애인이 되어 있었다.

 

네가 나를 선택한 그 순간부터

나는 너의 아픔이다

 

나의 첫 언어를 간직하고 떠나는 너에게

화인(火印)이 될

한 아픔을 주고 싶다

 

아픔은 위대한

씨앗이 될 수 있으므로,

 

 

 

 

    

 

 

 

 

그런 주유소 하나 없을까?

   



 

세상 어디

바닥난 사랑,

바닥난 눈물을 채워 주는

그런 주유소 하나 없을까?

 

지치고 허기진 가슴

구멍 뚫린 갈비뼈 사이로

주유봉을 꽂으며

"얼마만큼의 사랑을 넣어 드릴까요?"

하고 물어오는,

 

이 세상, 그 어디

바닥난 사랑, 바닥난 눈물, 바닥난 슬픔을

가슴 가득히 채워 줄

그런 주유소 하나 없을까?

 

 

 

 

   

 

 

 

 

개심사(開心寺)

 


 

마음이 눈을 뜨면

그대의 사랑을 볼 수 있겠는가?

그대의 슬픔을 만질 수 있겠는가?

 

비 오는 날, 개심사에 와서

당우를 넘어서는 문턱 앞에서

얼어붙은 발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잠든 부처님이 깨어나실까 봐

새들도 가만 가만 날아 앉고

목탁소리 조차 볼륨을 낮춘 절 마당에

홀로 서 있는 그림자 하나

 

문득, 바람결에 실려 온

마애삼존의 목소리

 

보이느냐

저 종루 끝에 매달린 바람소리가?

 

듣느냐

육해(肉海}의 파도를 빠져나가려는

저 심검당 기둥의 몸부림을?

 

 

 

 

 

    

 

 

 

가을의 서()

 


 

먼 하늘에 흰 구름

날아간 새 - 보이지 않는다.

산은 붉게 물들고 바람이 인다.

내게 부는 이 바람은

어디 사는 그 누가 보내온

서글픈 사연인가

 

가슴 저미는 그리움처럼

못다 읽고 닫아버린 슬픈 편지처럼

내 마음에 쓰이는 가을바람이여!

 

불붙인 가슴도 식어 가는 산

조금씩, 조금씩

자기를 비워가는 비탈의 나무

하얀 겨울을 기다리는 짐승들

젖가슴을 파고들듯이

어머니인 대지의 가슴팍을 후비고 든다.

 

, 마른 낙엽처럼 인생도 시들어

떨어진 꿈들이 바람에 불린다.

화려한 치장의 옷 벗고서야 비로소

정갈해진 숲

자신을 남김없이 내어 버렸을 때

환해지는 세상

 

나무와 풀 사이로

푸른 하늘이 스며든다.

깨끗한 영혼의 한 페이지처럼

맑게 펼쳐진 하늘 깊숙이

오랫동안 감춰놓은 미발표의 시를

적어 내려가듯

잎을 다 떨궈 낸 나뭇가지가

조용히 빈손을 흔들고 있다.

 

 





 


 

서귀포

 

 

 

 

저물어가는 바다는

제 몸의 멍든 즙을 짜내며

울고 있다

 

바다로 가는 낯선 길목 어디쯤

흐드러진 유채꽃밭

날개를 다친 나비 한 마리

미로에 빠졌다

 

아직도 눈먼 바다에 이르지 못했는데

아직도 찾지 못한 길이 있는데

 

길은 외길

나비는 까마득히

어둠에 젖고 있다.

 

 

 

 

 

 

    

 

 

 

낡은 의자

 


 

누군가가 앉았다가 떠나기를

수없이 한

작은 가슴에

따뜻한 사랑이 배어 있다

 

남기고 간 체온들은 뿔뿔이

바람에 흩어지고 없지만

침묵의 시간들을 품고 앉은 의자는

지나온 내력들을 낱낱이

새기며 앉아 있다

 

누구에게나 차별을 두지 않고

지쳐 돌아온 삶을

편안히 받쳐주었던 자비의

한 생애도 낡아

이제는 삐걱거리는 아픔으로

관절염을 앓고 있다.

 

세월이 깊어갈수록

이별이 가져다 준 슬픔의 무게를

견딜 수 없어, 의자는

지그시 입술을 깨문다.

 

 

 

 

     

 

 

희망

 


 

폐허의 하늘에도

별은 뜬다.

 

폭풍이 지나간 벌판에도

새들은 날아들 것이며

부러진 나뭇가지 끝에서도

새 움은 다시 돋아날 것이다

 

밤 깊은 가슴에도 아직

스스로를 몸 밝힐 촛불 하나는

남아있다

 

어둠 속에 살아있는 마지막 불씨처럼

얼어붙은 내 혈관에

뜨거운 피 풀어놓기 위해

최후의 발화를 꿈꾸는 성냥 알 한 개피는

언제나 남아있다

 

꺼져가는 불빛 속에

차고 푸른 세상의

못다 쓴 일기를 들여다보며

지상에서의 마지막 사랑을 덥혀 줄

따뜻한 눈물 한 방울은 언제라도

내 안의 샘에 남아있다

 

 

 

 

 

 

 

 

 

폭설 속에서 길 잃고 싶다

 


 

네가 하나의 길이라면

나는 폭설로 지워진 그 길 위에

나그네이고 싶다

 

그저 한 삼 년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명상조차도 얼어붙은

만년설의 빙벽 아래

갇혀, 모든 소리와 소리

사랑의 숨결마저도 얼어붙은 그곳에

잠들고 싶다

 

그대가 하나의 길이고

내가 그 길의 나그네라면...

 

 

 

 

 

 

   

      

 

 

휴전선





뼈마디 쑤셔오는 반세기의 디스크

겨레는 무엇이고 산하는 무어더냐

한탄강 휘도는 물길에 부유(浮游)하는 슬픔이여!

 

무지개가 철조망에 걸려

아프게 흩날리는 저녁

 

지는 해를 두고 증인이 되라 하면

누가 또 무슨 위증으로

우리 가슴 훔칠까?

 

이름 없는 꽃들도 기억하는데,

이름 없이 묻혀간 뼈들도

기억하는데-

 

 

 





 

첫사랑




봄이

연둣빛 입술을 들고 와

폐허에 입 맞출 때

메마른 가슴에서 솟아난

푸른 싹 하나!

 

초록물결 넘실대는 밀밭 길을

더듬어 가고 있는

아련한 청춘의 푸른 기억 속으로

가슴 설레던 그날의 연서를

입에 물고

푸르륵

종달새 한 마리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너를 위해 비워 둔 의자

 


 

기다림이 하도 오래어서

몸의 구석구석에 녹이 슬었다

 

가늠할 수 없는 적막 깊이

이룰 수 없는 꿈 부스러기들과

빈 가슴 가득히 쌓인 먼지를,

그리고 낙엽이 쌓여가는

공원 한 구석을 지키고 있는

빛바랜 벤치를

어찌 다 기억하겠는가만

마음에도 이제 해 질 때가 된 것인지

풀벌레가 서러움을 풀어 놓는다

 

하루하루를 늘상 구름으로 흐르면서

어찌

어둠이 앉았다 떠난 자리

지친 별빛을 다 헤아릴 수 있을까 만은

누군가

어두운 가슴에 횃불을 켜드는

손이 있다는 걸 알고 있지

 

타다가 꺼져버린 숨 막히는 순간에도

늘 너를 위해 남겨 둔

빈자리 하나

 

돌아오라고, 언제까지나 가슴 한켠에

너를 위해 비워 둔

의자 하나 있다.

 

 

 

 


 

 

 

 

풀들은 힘이 세다

 


 

당신은 본 적 있는가?

 

어둠 뒤편에서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한 풀씨들이

허리에 단단히 힘을 실어 어깨를 펴고 일어서며

돌을 들어 올리는 것을?

 

그리고 당신은 듣는가?

 

몇몇 새싹들이 안간 힘을 다 해

그 연약한 어깨 위로 무거운 돌덩이를 들어 올릴 때

우주 한 모서리가 들썩이는 소리를?

풀들의 어깨뼈 쏟아지는 소리를?

 

하지만 풀들은 기어이 해내고 말았네.

환한 빛을 찾아 일어서고 말았네.

 

나는 알았네.

풀들은 정말 힘이 세다는 걸,

 

 

 

 

 

 

 

      

 

 

 

서투른 사랑을 위하여

 


 

이방인처럼 너에게 다가간다.

서투른 고백, 서투른 몸짓으로

목마르게 너를 부른다.

 

진실은 조금 서투르다는 걸

너도 알지?

 

거짓은 얼마나 완벽한 미소로서

너를 점령하고 쓰러뜨리는지

 

언젠가는 너도 알게 될 테지만

, 그 땐 이미

태양은 우리를 비추지 않으리.

 

아마존 푸른 강도

우리들 심장을 흐르지 않으리.

 

 

 

 

 

      

 

 

 

고니

 


 

물 한 모금 마시고 우러르는 하늘엔

빛바랜 가을엽서가

길이 먼 강 목선처럼 떠있는데

흐름이 깊을수록

쓸쓸하지 않게

헤엄치는 법을 배워둬야지

 

이런 날에 나는

한 마리 고니

펜의 촉 같은 부리로

물위에 시를 쓴다.

 

간혹, 물고기들도

내 시를 읽을 수 있도록,

 

나는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 앞을

옆모습을 남기며 지나간다.

그들의 가슴 속 고요한 수면 위에

지울 수 없는 파문을 새기며

 

까칠한 손이 가슴을 스칠 때

몸의 가장 따뜻한 곳

깃털 하나 뽑혀

수면 위로 떨어진다.

 

그 깃털, 맑게 닦은 하늘에

새털구름으로 흐르는 걸 본다.

 

가벼운 목숨의 한 정표(情表)

곧 사라지고 말 흔적이다

 

나는 믿지 않는다.

사랑이 영원하리라는 그 말

깃털 같은 그 언약을,

 

 







 

다시, 동화사에서





눈꽃 뒤집어 쓴 동백나무 숲

오늘 다시 뜨거운 옛 불씨 되살아나

입 가득 머금은

차고 맑은 웃음소리 들린다.

 

기억 속의 어머니 손을 잡고

동화사 뒷길을 걸어내려 간다.

냇돌 반지르한 살얼음 위를

차르르 흘러내리는

겨울 햇살의 따스함이여!

 

눈밭을 쓸고 가신 무명치마 자락에

걸려 넘어진 맑은 바람들이

- 하니

들뜬 얼굴에 묻어올 때

목이 떨어져서도

미친 녀석처럼 히죽 히죽 웃고 있던

참수된 동백 - 붉은 머리들을 주워 주워서

지푸라기에 길게 꿰어

인디언 추장의 부적처럼 붉게

가슴을 적셨던 그 저녁의

마지막 해가 - 지금

가슴 한가운데 다시 떠오른다.

 

목소리 쉬지 않고

천년을 넘어 울어온 범종소리

마음의 핏줄 하나하나를 흔들어 깨워놓고

동백 숲 속으로 잦아들고

절간 옆구리에 깨진 기왓장

젖은 눈 희미해지면

촛불 밝힌 법당 안

독경 소리 은은하고

공양 올릴 저녁밥을 짓기 위해

행자승 한 분 부산히 정재소로

마른 장작 한아름을 안고 들어간다.

 

숲을 꿰어온 바람

추녀 끝을 스치면

이른 별은 풍경 끝에 빛나고

어스름 저녁달이

대웅전 용마루에 턱 - 하니 걸터앉아

분주한 넋들을 거두어

거울처럼 비쳐주고 있다

 

일 배, 이 배, 삼 배, 사 배 수천수만 배

기도의 손 모으는 사바의 중생들

 

금좌의 부처는

가만히, 침묵 속에

비움 없는 마음들을 내려다보고

빙긋이 웃고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