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문학의 즐거움]

현대시(제1목록-12편)

로뎀추리 2009. 9. 1. 13:56

 
목숨의 무게
이복현
 
 




세상의 그 어디를 들여다 보아도
단 하나
가벼운 목숨이 있더냐

마른 풀잎 하나에 깃들어 있는
우주의 숨결

알 수 없는 새가 빠뜨리고 간
겨울 숲의 깃털 하나,
깃털에 묻어 있는 따뜻한 체온

낙과조차 하지 못한 겨울나무
헐벗은 가지 끝에
쭈글쭈글 말라 붙은 산수유 붉은 열매

무엇 하나, 그 어디
무겁지 않은 목숨이 있더냐.




 
 

[현대시]
 
선인장꽃
이복현
 
 



   선인장꽃

             이복현


전생의 죄업이 얼마나 크기에 
온몸 촘촘히 
가시를 달고 태어났을까?

스스로를 엄히 벌하여 경계하는 
뼈아픈 너의 뉘우침 앞에  
산 같이 쌓인 나의 죄업이 
한 없이 부끄러울 뿐이러니 

꽃 중에 아름다운 꽃이로구나. 
가슴속 
백 년의 고독을 끌어내어 
한 송이 혈화(血花)로 펼쳐 보이는,

 

 

[현대시]
 
북극성
이복현
 
 


    북극성


             이복현



하늘 어느 외딴 섬일지도 모르는, 

아주 오래전부터 
누군가 아름다운 한 사람이 꼭 살고 있을 것만 같은, 

머  나  먼     그리움의 종착역.

 

 

[현대시]
 
야근하는 날
이복현
 
 



    야근하는 날 


              이 복 현


종이컵 속에 별 몇 개 빠져 있다. 
어둠이 낳은 도시의 네온을 콘크리트 바닥에 깔고 앉은 
깜깜한 옥상 한 구석에서 
낡은 흑백의 영상처럼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며
커피 한 잔씩을 나누어 마신다.
녹슨 자판기에서 빠져나온  따뜻한 온기를  
두 손으로 감싸 쥘 때 
고단한 하루가 종이컵 속으로 풀어져 섞인다. 
컵 속에서 하늘의 깊이만큼  먼 바닥으로 
떨어진 별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다. 
뻐근한 어깨를 휘감아드는 바람 한 점 
끌어안기도 전에 미운 오리새끼처럼 통로를 빠져나간다.
사람들은 땀을 닦으며 미래의 꿈들을 말하지만 
끝내 종이컵 속에 빠진 별 하나를 끌어내지 못하고 
모두들 캄캄한 밤의 계단을 걸어 내려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하강한다. 
시간은 일정한 간격으로 길을 내고 있고
우리는 차례로 줄을 서서 좁은 통로를 지나간다.  
컨베이어시스템 위로 실려 가다가 
어느 지점에서 분류되는 상품처럼 우리는 
지폐 몇 장에 포장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우리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을 때 까진 
또 몇 날의 밤이 더 필요한걸까?
엘리베이터는 멈추고,  우리는 
희미한 형광등 밑으로 다시 모인다.
조금 전의 그 어둠 속 
하늘은 얼마나 선명한 거울이었나 ! 생각할 때
괘종시계가 새벽 한 시를 알려온다. 

 

 

[현대시]
 
황소
이복현
 
 


      황 소


              이  복  현


이제 내가 이 땅에서 할 일은 다 끝난 거야.
언제부턴가  나 보다 몇 배나 힘 센 놈이 나타나 
그 녀석이 내가 할 일을 몽땅 빼앗아버린 거야.
내 온 몸을 다 바치고, 온 힘을 쏟아 논밭을 일구어서 
씨 뿌리고 수확할 때에 나는 영웅 중에 영웅이었지.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나를 우러러보는 이 없어.
나보다도 더 강한 무쇠의 턱과 무쇠의 어깨,
둥글 넙적한 고무다리를 지닌 놈이 나타나면서부터이지.
그 놈은 어찌나 기운이 센지 단숨에 
너르나 너른 저 들판을 다 갈아엎고서도 
침 한번 안 흘리는 괴물이지.
이제 나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게야.
그래도 내게 마지막 할 일이 남았다면
끝까지 나를 잘 돌봐 준  우리 주인어른께 
비록 늙은 몸이지만, 이 몸의 살과 뼈를 다 바쳐서 
보양을 시켜드리는 거야.
내 전부를 몽땅 드리는 거야. 
그래도 나는 내 존재의 허무에 대해 
전혀 슬프지 않아.
봐! 이렇게 울지도 않잖아?     
눈물도 보이지 않잖아?

 

 

[현대시]
 
흑백 사진 한 장
이복현
 
 


       흑백 사진 한 장

                       이  복  현

   
팻말이 희미한 교실 한켠에 매화꽃이 만발했다.
한가운데 우뚝한 큰바위 얼굴  하나 
그 넉넉한 이마 위로 환한 햇살이 흘러내린다. 
몇 년 전 회갑을 맞으신 초등학교 육학년 담임선생님께서
아이들과 함께 웃고 있는 빛 바랜  흑백 사진 한 장 
무엇인가 이 안에서 꿈틀거린다.
몸 안에 숨어 있던 촉수들이 일제히
저요! 저요! 손들고 일어선다.

내가 절룩거리며 
꿈의 징검다리를 건너지 못했을 때 
건너가라고 등을 받쳐 주시던 분
중학교 합격 발표가 있던 날 밤
순천 어느 극장에서 
영화 [남이장군]을 보여주고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게 
노란 감귤을 쥐어 주시던 따뜻한 손 ,
지금은 쭈굴해진 그 손등을 만져본다.     

다시 소년이 된 내 옆에서 
그가  아직도 웃고 있다.
그의 사랑으로 교실 안이 환하다. 
사십여 년 전의 육학년 일반
구슬처럼 맑은 웃음소리가 교실에 가득하다. 
흑백사진 속으로 그 때의 초등학교 친구들이 몰려오고 
나는 지천명의 아이로 다시 태어나
그 안에  있다. 
그 시절 선생님의 따뜻한 손과 함께. 

 

 

[현대시]
 
무명無名이 무명無名에게
이복현
 
 

더듬이 없이도
거미줄 같은 세상골목을 빠져 나와
용케도 여기까지 도망쳤구나
누가 띄워 놓았는지 모르는 종이배처럼
운명의 물결에 떠내려온 사십 년

봄이 오는 길목
무너진 담장가에 서서
환한 햇살의 위로를 받으며
한 물굽이 건너
남아 있는 잔설의 기슭을
망연히 바라본다

눈물빛 청춘을 건너는 동안
황량한 가슴 언저리
그늘진 지평에도
나비처럼 눈은 내려
방향을 알 수 없는 지워진 길 위로
눈이 부시도록 쏟아져 내린 은빛 햇살

나는 길 위에 쓰여진
내 이름을 지운다
고요한 무명을 생각하며
강아지 같은 나의 이름을 데리고
대낮에도 불을 켜야 하는
세상의 낮은 계단
깜깜한 지하로
더듬거리며 내려간다.

 

 

[현대시]
 
다시, 동화사에서
이복현
 
 

눈꽃 뒤집어 쓴 동백나무 숲
오늘 다시 뜨거운 옛 불씨 되살아나
입 가득 머금은
차고 맑은 웃음소리 들린다

기억 속의 어머니 손을 잡고
동화사 뒷길을 걸어내려 간다
냇돌 반지르한 살얼음 위를
차르르 흘러내리는
겨울 햇살의 따스함이여!

눈밭을 쓸고 가신 무명치마 자락에
걸려 넘어진 맑은 바람들이
싸 - 하니
들뜬 얼굴에 묻어올 때
목이 떨어져서도
미친 녀석처럼 히죽 히죽 웃고 있던
참수된 동백 - 붉은 머리들을 주워 주워서
지푸라기에 길게 꿰어.
인디언 추장의 부적처럼, 붉게
가슴을 적셨던 그 저녁의
마지막 해가 - 지금
가슴 한가운데 다시 떠오른다

목소리 쉬지 않고
천년을 넘어 울어온 범종소리

마음의 핏줄 하나 하나를 흔들어 깨워놓고
동백 숲 속으로 잦아들고
절간 옆구리에 깨진 기왓장
젖은 눈 희미해지면
촛불 밝힌 법당 안
독경 소리 은은하고
공양 올릴 저녁밥을 짓기 위해
행자승 한 분 부산히
정재소로
마른 장작 한아름을 안고 들어간다

숲을 꿰어온 바람
추녀 끝을 스치면
이른 별은 풍경 끝에 빛나고
어스름 저녁달이
대웅전 용마루에 턱 - 하니 걸터앉아
분주한 넋들을 거두어
거울처럼 비쳐주고 있다

일 배, 이 배, 삼 배, 사 배 … 수천 수만 배
기도의 손 모으는 사바의 중생들

금좌의 부처는
가만히, 침묵 속에
비움 없는 마음들을 내려다보고
빙긋이 웃고 있을 뿐.

 

[현대시]
 
산골마을에 내리는 눈
이복현
 
 

눈이 내린다
손가락을 펴서 제 얼굴을 가리는
수줍은 소녀처럼
하늘도 부끄러워 눈을 내린다.

두메산골 초가집 탱자울타리에,
청대숲, 싸리문, 장독대 위에
방학중인 초등학교 텅 빈 교정에
앞이 안 보이게 쏟아지는 눈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이름을 잊어버린 벌처럼
다시는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주는 용서처럼
서로가 서로를 기억해내려는
화해의 악수처럼,
산골마을에 눈이 내린다

때묻은 세상을 하얗게 지우고
새 그림을 그려 넣으려는 듯
커다란 한 장 화선지를 만들어간다.

 

[현대시]
 
숲으로 난 작은 길
이복현
 
 

홀로 누워 있지만 버려진 건 아니다

누군가가
산갈대 흐느끼는 이 곳을
몰래 몰래 지나갔을 것이고
또 어떤 이는
눈 쌓인 언덕을 조심스레 거슬러
저 산 고개 너머로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갔을 것이다

몸 무거운 산짐승이 지나간 자리
지워진 길 위로
새들이 또 다시 발자국을 찍고
차가운 바위 위에 잠시 쉬어 가면서
푸른 하늘 바람에
못다 간 영혼들을 실어보냈을 것이다

오늘 다시
남은 열매로 불 밝힌
나무들을 만나러
눈발처럼 아픔을 흩뿌리는
흰 갈꽃을 만나러
혼자서 찾아 든 숲길
길 위에 침묵을 새기며
바람은 또 다시 옛사랑을 찾아
길을 떠난다.

 

 

[현대시]
 
겨울벌판에서
이복현
 
 

마른나무 가지를 꺾어 모아
겨울 한복판에 불을 지핀다
살얼음 진 하늘 한쪽이
눈물처럼 녹아내려
영혼의 옷깃을 적신다

태양도 식어버린 잿빛 하늘 아래
바람 불고 눈발 날리면
붉은 귓볼을 달고
함께 집으로 돌아오던 친구들

언 논배미에 함께 모여
무지갯빛 세상을 꿈꾸며
팽이채를 휘두르던 아이들은 모두
지금쯤 어느 하늘 아래
고단한 짐 내려놓고
모닥불을 쪼이고 있을까

불티가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시나브로 사그라드는 불꽃 위로
눈발이 녹아 내릴 때
그리움은 또 다시 나를 끌고
앞이 안 보이는 눈보라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아, 어둠이 우리를 용서할 때까지
우리는 또 다시
그리움을 찾아 떠나야 한다
방랑의 길을 가야만 한다.

 

 

[현대시]
 
휴전선
이복현
 
 

뼈마디 쑤셔오는 반세기의 디스크
겨레는 무엇이고 산하는 무어드냐
한탄강 휘도는 물길에 부유하는 슬픔이여!

무지개가 철조망에 걸려
아프게 흩날리는 저녁
지는 해를 잡아 두고 증인이 되라 하면
누가 또 무슨 위증으로
우리 가슴 훔칠까?

이름 없는 꽃들도 기억하는데,
이름 없이 묻혀간 뼈들도
기억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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