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문학의 즐거움]

현대시(제5목록-12편)

로뎀추리 2009. 9. 1. 14:19

[현대시]
 
돌아오지 않는 새
이복현
 
 

외진 기슭에 옹달샘 하나 있어
새들이 가끔
목을 적시러 찾아오더니
이제는 오지 않는다

울음을 씻어
나뭇가지에 걸어두고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새는
저 우주 바깥의
어느 해지는 마을쯤을
가고있는 걸까

저녁연기 닿는 그 곳
새야, 새야,
훨훨 깃 치며 날아가 버린 새야!
언제 다시
목마른 세상의 꿈을 적시러
돌아오려느냐?

 

[현대시]
 
가을 이야기
이복현
 
 

해가 뒷산 상수리나무 그늘을 벗어나
긴 그림자로
마을 앞개울 징검다리를 건널 즈음
아버지에게 매맞고 집밖으로 쫓겨나던 날
회초리자국 난 종아리를 어루만지며
마구간 옆에 쌓아놓은
건초더미를 베고 누워
기러기 날아가는 먼 하늘을
바라본 적 있었다

어린 별이 눈 깜박이며
먼 하늘 길 아장아장 걸어와서 손잡고
같이 놀아달라고 응석부리던
초저녁 무렵이면
어스름 속에서 깨어난 시냇물소리
귀뚜라미 그 소리

나는 마른풀 냄새에 묻혀 잠이 들고
아버지 어머니가 나를 찾아 낼 때까지
고단히 잠든 나를
그 어린 별들이
밤새워 지켜 주었던 일을
지금에사 고맙다고 생각하는 나

내가 이처럼 어른이 되어 있듯이
그 때의 어린 별들
지금쯤
어느 하늘 머언 나라
어른별이 되어 있을까

 

 

[현대시]
 
마음에 진 물골 하나
이복현
 
 

지리산 칠불사 밑
한 미륵이 울고 있다
번득이는 칼 빛 속 세상은 너무 밝아
산 깊은 숲 속에서 울고 있는 미륵
계곡을 샅샅이 씻어 흘러
깊은 바닥을 굽이쳐 흐르는
돌울음소리
여러 천년을 그침 없이 울어도
목소리 지지 않는 그 울음에 떠밀려
산을 내려온다
몸과 마음 다 젖어 산을 내려온다

산을 떠나 탁류 속에 몸을 맡겨 흘러도
마음 속 도랑 하나
밤이나 낮이나 돌돌 우는 것은
아마도 그 미륵의 울음이 파 놓은
깊고 맑은 물골임에 틀림없다.

 

[현대시]
 
능금
이복현
 
 

빛이 쏟아지는 은뱅반 위에
수줍음에 얼굴 붉히는 능금 하나

저렇듯 태양의 입술은 힘이 있어
뺨에 피가 맺히도록
강렬한 입맞춤을 한 것이다

그 붉은 정념의 포획을 꿈꾸던 내가
뱀처럼 날렵하게 한 입 깨물었을 때
투둑둑! 터져 흐르는
향기로운 살내음
달콤한 밀애를 꿈꾸며 덜벼들었다가
단 한 번의 입맞춤에 혼절하고 만다.

 

 

[현대시]
 
녹슬지 않는 사랑
이복현
 
 

임부의 자궁처럼 아늑한, 오늘 밤
너를 닮은 예쁜 별 하나
잉태하고 싶다

비 개인 하늘이 품고 앉은 사랑
천년 만년 녹슬지 않는
금빛 요정 하나 만나고 싶다

소나기에 장미꽃 지듯
그런 사랑 말고
불 당긴 구름노을 스러지듯
잠시 타오르다 말
그런 아픔 말고
산과 들의 온갖 금수들 목마름
다 적셔주고도
아직도 맑게 솟구치는
깊은 산 속의
숨어있는 샘물처럼, 그렇게
끝이 없이 솟구치는 사랑 하나
만나고 싶다

지상의 어떤 보석보다도 빛나고 값진
눈물 하나
가슴에 브로치로 달아주고 싶다

개인 하늘처럼 깊고 푸른
너의 가슴 속
네 꿈의
높고 푸른 하늘복판에
영원토록 반짝이는 빛이 되도록,
어두운 세상 길 밝혀주는
등불이 되도록,

 

 

[현대시]
 
이름 모를 섬에서
이복현
 
 

낙도 푸른 물결에 묻어나는
잿빛 갈매기 떼 울음소리
자꾸만 앞가슴을 파고드는데
이름 모를 섬에 와서
섬의 귓가에 입을 대고
'섬!' 하고 조용히 속삭여 불러보면

섬은 차라리
먼바다 지쳐
돌아온 물바람에 젖어있는
목소리 좀처럼 알아듣지 못하고
딴청만 부린다

갈매기 알을 낳는 기슭마다
갯바람에 마른풀들 서걱거리고
파도는 치친 가슴을 씻어
햇빛 그을린 돌판 위에
쓸쓸함을 널어놓는다

세월이 스치고 간 귓속
달팽이관이 맑아오면
파도소리는 나를 데리고
멀고 먼 수평선 밖으로
달음질쳐 간다

 

 

[현대시]
 
사라진 낭만시대
이복현
 
 

강을 건너는 다리 위에도
새들이 노래하는 숲에도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철길에도
한적한 오후의 카페에도
낭만은 없다

가다가 필름이 끊어지는 삼류극장에도
냇물과 강속에도
비 젖은 하늘에도
들꽃 흐드러진 벌판에도
마른 풀섶에 묻혀 우는 벌레들의
아픈 울음 속에도
아아, 낭만은
사라지고 없다

눈물의 섬 뒤편으로
도도히 흐르는
시간의 물결이여
거침없이 흘러 바다에 잠겨버린
뜨거운 노래여
마지막에 나누는 입맛춤까지
사라지고 없는
낭만시대여 -

 

 

[현대시]
 
신륵사
이복현
 
 

무처님 옷자락 한 겹이
여강 물살에 젖고 있다

석탑그늘을 깔고 앉은 조사당에는
무학대사가
오수를 못 이겨 졸고 있다

하늘을 괴고 있는 연주문이
거울처럼 강물을 들여다보고 섰는데
노스님 독경소리가 바람을 타고
유유히 강을 건너
건너편 둑방에 앉아 낚시질하는
태공의 귓전에 부서져 내린다.

 

 

 

[현대시]
 
갈 수 없는 섬
이복현
 
 

뱃길로 닿지 않는 섬
대양을 건너서도 이를 수 없는


그대 안에는
지상에 없는 섬 하나 있습니다
우주를 다 뒤져도 만져도 만질 수 없는
섬이 있습니다

물빛 너무 푸르러서
차마 건널 수 없는 섬

바라만 볼뿐인 그 거리가
섬을 아름답게 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섬은 손닿는 않는 곳에 홀로
고요롭습니다

 

[현대시]
 
아침
이복현
 
 

지금
어느 푸른 해역을
지느러미치며 가고 있을
내 은빛 물고기여 -

멍든 바다의 가슴위로 돋아난
칼날같은 비늘을 뚫고
지친 아가미를 활짝 벌려
거친 숨 몰아쉬며 달려가고 있을
날렵한 등줄기
푸르고 눈부신 유영이여 -

 

 

[현대시]
 
청둥오리에 관한 기억
이복현
 
 

정 이월 어느 찬 날
보리순들 발꿈치를 들어올리며
네가 크나 내가 크나 키재기 할 때
밤의 계곡 살얼음을 깨고
야윈 가슴속으로
청둥오리 한 마리 날아들었다
산 위의 집으로 가는 길섶에
하현달빛의 비늘을 털어 내며
목울음 울던 새
새벽을 기다리며 울던 그 새는
지금도 내 안에서
물 젖은 날개 털고 있다.

 

 

[현대시]
 
세상 모든 꽃들은 간음을 꿈꾼다
이복현
 
 

세상 모든 꽃들은 간음을 꿈꾼다는 사실
아는 사람 몇이나 될까

가파른 절벽을 더듬어
골짜기로 추락하는 비명소리
떨어져 물방울처럼 흩어지는
안개의 신음소리

다만, 몇 송이 꽃들
기나긴 음모의 밤을 결별하기 위해
눈물을 달고
절벽 아래로 기어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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