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문학의 즐거움]

현대시(제7목록-12편)

로뎀추리 2009. 9. 1. 14:30

[현대시]
 
뿌리의 말
이복현
 
 

뿌리의 말



바람에 쫓겨 온 낙엽이 
상처 진 알몸으로 
불거진 나무뿌리를 감싸안아 준다

뿌리가 말했다

"고맙구나
 너의 아픔으로 나의 시려움을 덮어주다니!
 네 몸의 구멍난 상처 사이로 
 마알간 하늘이 보이는구나
 상처가 하늘만큼이나 맑구나!"

 

[현대시]
 
오후
이복현
 
 

오후



시골의 가을볕은 따습기만 하여 
기대어 누우면 언제라도 
잠이 들 것 같은 오후

건초더미 위로
예쁜 치아를 가진 햇살이
내려앉는다
마른 잎 위에 가만히 엎드려
풀 향기를 맡고 있는 잠자리
눈망울 속으로
목련꽃부리 같은 흰 구름이
보송송 잠겨온다

사는 일 때로는 심심하여
그늘에 들 앉아 
바람에 실려오는 풀무치소리나
귀 기울이면
지나온 아픔은 아픔대로 
살아갈 걱정은 걱정대로 그렇게
흘러 못 단 강물로 지나가는 것을
애면글면 가슴 태운 날들이
날개를 못 접고
조롱 끝에 잠든 명주잠자리같이
불안한 휴식으로 매달려 있었음을
알곤 있었지만
내겐 늘 그 불안한 휴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현대시]
 
지금, 숲에서는
이복현
 
 

지금, 숲에서는



2월의 끝자락 

새 없는 빈 둥지에 
햇살만 가득하다

지금, 숲에서는 
나목의 그늘, 마른 잎을 헤치고 
쏘옥 고개를 내민 부용초
희고 긴 목둘레를 
따뜻한 바람이 휘감고 돌며
가쁜 숨 몰아쉬고 있다

봄이 오는 길목 어디쯤서 
서투른 사랑을 나누다가 들켜버린 
바람이 지금 내 안에
불어오고 있다 
마른 잎 쌓인 가슴언저리 
잔설 녹아 젖은 촉촉함 밑으로 
희고 맑은 뿌리를 뻗어 내리는
연초록 생명과 대지의 밀월
숨가쁜 신음소리 한창이다.

 

 

[현대시]
 
만나고 싶은 사람
이복현
 
 

가슴에서 풀 냄새가 나는
그런 사람 한 분 만나고 싶다
인공의 숲에서는 맡을 수 없는, 그런 향기로
날마다 나를 깨우는,

산새소리, 솔바람소리 같은
그런 친구, 그런 사람

 

 

[현대시]
 
4월
이복현
 
 

살아가는 동안에
한 번쯤
4월의 강둑 길을 걸어볼 일이다

실바람소리에 귀를 여는 제비꽃.
장난스럽게
혀를 낼름 내어 미는 삘기꽃이라도
만나볼 일이다

철없이 풀밭을 뛰어 다니는
어린 여치
햇살 반짝이는 미루나무 떡잎 사이로
위험스레 흔들리는 까치집 하나
가슴에 품고 돌아올 일이다

 

[현대시]
 
애기똥풀 하나
이복현
 
 

대견하여라

절개지 붉은 상처 위에
갓 피어난 애기똥풀 하나

홀로 바람에 떨고 있는
작고 안쓰러운 것이
인간이 짓밟고 뭉개어 놓은
지구의 상처부위를
향그럽게 수놓고 있다는 이 사실!

놀라워라

실오라기 같은 그 뿌리가
거대한 대지의 동맥에 접속되어 있어
푸르게 맥박치면서
불어오는 바람을 견디어내느라
안간힘으로 일어서는 모습!

 

[현대시]
 
동백꽃이 지다
이복현
 
 

이승의 발 밑으론 푸른 강이 흐르는데
아슬한 벼랑 끝에 동백 한 그루
꽃잎 붉게 지다

뜨거운 핏빛 넋을 따라
침묵을 머금고 흐르는 강
바람이 불면
꽃잎을 가슴에 품고 출렁이던 강이
은빛꼬리를 남기고
어둠 속으로 미끄러진다.

 

 

[현대시]
 
고백
이복현
 
 

여인이여,
세상에서 가장 순결한
장미 한 송이를 꺾어
그대 앞에 무릎을 꿇는
한 사내를 바라보십시오

비록, 황금의 의상으로 그대에게
왕관을 씌워 주진 못해도
그대의 눈물자국을 닦아드리고
비 젖은 가슴을 녹여 줄
모닥불 같은 사랑 하나
들고 왔습니다

순간을 영원같이
영원을 순간같이
하나로 엮어
서로를 위해 죽을 수 있는
그 믿음으로
그대 앞에 섰습니다

받으소서
나의 사랑을!

 

[현대시]
 
꽃샘바람
이복현
 
 

바람 센 봄날
배꽃 잎
눈보라처럼 날린다

도원에 만발한 복숭아꽃
산산이 흩어져
붉은 융단처럼
발아래 깔린다

하, 평화스러운 날의
달콤한 밀월을 꿈꾸던 벌나비들
다 어디로 가고 없나

바람 센 날
눈물처럼 배꽃 잎 지는 걸 본다
도원에 복숭아꽃
하염없이 지는 걸 본다.

 

 

[현대시]
 
쓸쓸함에 관하여
이복현
 
 

쓸쓸한 사람들이
쓸쓸한 거리로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쓸쓸한 시간에
쓸쓸한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전혀 쓸쓸하지 않다

어떤 날은 몹시 쓸쓸해지고 싶어
쓸쓸한 바람 부는 강가로 가 보지만
쓸쓸함은 또한 쓸쓸함끼리 한 무리되어
떠나가 버리고
쓸쓸함에게조차도 외면 당한
나는
지상에서 최초로
전혀 쓸쓸하지 않은 사람이 된다.

 

[현대시]
 
호수, 그리고 달
이복현
 
 

누군지 알 수 없는 투명한 손이
검푸른 접시 위에
노른자를 풀어놓고 있다

이상한 일이다
수면을 스쳐간 바람이 사라지면
풀어졌던 노른자가 다시
황금전이 되어
고요 위에 놓인다

또 다른 검은 손이 어둠을 들고 와
덧칠하고 있다
천지는 잠시
암흑의 중심으로 빠져든다
이상한 일이다
또 다른 어떤 손이
검은 물감을 거두어 가면
잠시 지워졌던 가슴속의 황금전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한다
금전이 반짝일 때마다
벌레울음소리도 점점 커져 간다.

 

[현대시]
 
사람도 섬이 될 수 있으므로
이복현
 
 

섬은 그 이름만으로 충분히
외롭다

깊고 푸른 물길 속에 아랫도리 다 잠겨
머리통만 살짝 내놓은 채로
바람과 파도에 맞서 있는.


오죽 외로웠으면
바짓가랑이 걷어붙이고
검푸른 파도 속으로 첨병
뛰어들고 말았을까
오죽 허면

누구든 외롭지 않고서는
섬을 모르듯이
또한 스스로 섬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외로움을 안다 할 수 없으리

누구든 섬이 될 수 있고.
누구든 섬이 된 적도 있고.
누구든 섬이 되고 싶기도 한 것이란 걸
아는 사람,
그는 충분히 섬이 될 자격이 있다 하리니

섬.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쓸쓸하다는 걸 아는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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