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문학의 즐거움]

현대시(제9목록-12편)

로뎀추리 2009. 9. 1. 14:40

[현대시]
 
그림자
이복현
 
 

내가 너를 모른다 해도 
그 부름에 스민 
존재의 한 알갱이
그걸 통해 
난 너를 기억할 것이다

보리수 나뭇잎에 가을이 깃들 때 
추수 끝난 빈 들판을 떠돌며
태양의 깃 아래 맴도는 
메아리들을 주을 것이다
가엾은 너의 긴 꼬리를 거두어 
네 곁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현대시]
 
지금, 여기 있음을...
이복현
 
 

밤은, 그대 
영혼의 촛불 켠 자리에서 
시작되고, 애절한 
기도의 끝절에 불어와 멈추는 한 점 
바람의 속삭임 속에 
묻혀 있다

불러도 그대는 
불러지지 않고
미궁에서 맴돌다가
머얼리 사라져 버린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 
그대와 나 사이를 흐르는 강에
무슨 파문 하나 만들 수 있겠는가?
세월은 한 잎 낙엽에도 부서지고 
솔잎 끝 이슬 한 방울에도 
잠겨드는데...

그런데, 이슬은 
어디로 갔는가?
지금, 여기 있음을 
먼 훗날 기억하지 못하리
아픈 세월이 감추어진 이 순간을, 

 

 

[현대시]
 
작은 램프 속에 갇힌 영혼
이복현
 
 

오늘도 나는 
희미한 램프 속에 갇혀 있다

혼자 있는 시간, 적막을 빨아들이며
타오르는 영혼 

램프 속에는 
내가 좋아하는 타고르가 있다 
내가 기뻐하는 지브란이 있다
아주 작은 램프 속에서 
더 작아진 나를 만난다

드디어 하나의 램프가 큰 소리로 
벽을 깨뜨리고
빛의 바깥으로 사라졌을 때
그 깊은 어둠 속에서 
존재의 틀 안에 갇혀 있던 우주 하나
새 빛을 발하며 일어선다
알고 보니 다름 아닌 내가, 그
무한의 우주였던 것이다

우주는 램프 속에 갇혀 있고
램프는 그 우주를 태우며
밝아지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었던 것이었다.



[현대시]
 
풀들은 힘이 세다
이복현
 
 


당신은 본 적 있는가? 

  어둠 뒷편에서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한 풀씨들이 
       허리에 단단히 힘을 실어 어깨를 펴고 일어서며
  돌을 들어 올리는 것을?

그리고 당신은 듣는가?

  몇몇 새싹들이 안간 힘을 다 해 
     그 연약한 어깨 위로 무거운 돌덩이를 들어 올릴 때
        우주 한 모서리가 들썩이는 소리를?
           풀들의 어깨뼈 쏟아지는 소리를?

하지만 풀들은 기어이 해 내고 말았네
  환한 빛을 찾아 일어서고 말았네

나는 알았네 
  풀들은 정말 힘이 세다는 것을...
 

[현대시]
 
혼자 가는 길
이복현
 
 

시력 2.0
눈을 크게 떠도 
세상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안개 무성한 기슭에 숨어 있는 길들 
무수히 덫을 놓고 기다리는 삶

솟구친 돌뿌리가 발에 걸려도 
밉지를 않다 

혼자 가는 길 
때로는 쓸쓸하고  때로는 따뜻한 
길의 적막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듣는다
바람을 타고 오는 꽃들의 숨소리 
굴을 나서는 짐승들의 발자국소리를 
숲 속 어디선가 개미들이 
성을 쌓다가 성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를 

그들은 알고 있다
모든 길의 끝은 
또 다른 길로 접어드는 첩경임을,
    

 

[현대시]
 
본능을 위하여
이복현
 
 

유혹하는 자는 멋있다
유혹 당하고 싶은 자 보다는,

대부분은 
덫에 걸린 짐승처럼 살아간다
용기 없는 풋나기로,
고독할지라도 고독하지 않은 척
등 돌린다

날 마다 저탄의 길을 가며
아픈 목소리를 낼게 뭐람!
쓸쓸하게 뒤돌아 보며
휘바람 불게 뭐람!

차오르는 눈물에 배 띄울 만큼
가슴은 한껏 출렁여도

못 다 채운 바람을 끌어안는 애증

오늘 밤, 난
누군가를 유혹해야겠다
고혹한 창녀처럼
그 누군가의 품 속으로
기어들어가야겠다.

 

 

[현대시]
 
들꽃
이복현
 
 

저 神의 뜰에 보이는 미소
아득한 하늘을 겨냥하고 있다
바깥에 그려진 포물선은
채색된 내 가슴이 날아간 자리

흔적을 지우려고 애 쓸 필요 없다
있는 그 대로, 겪은 그 대로
남겨 두고 살아가는 이치
내 이 가냘픈 삶이
한송이 들 꽃에 지날지라도
다가오는 그를 배척하지 않는
입술은 언제나 향그럽게
열려 있다

일단 입 맞추면
아픈 화흔을 짓는다
(내 사랑은 불쇠처럼 뜨거우므로).

 

 

[현대시]
 
나는 때때로 무너지고 싶다.
이복현
 
 

나는 때로
깊은 우물 속에 빠지고 싶다
아주 오오랜 낙하 끝에
어둠의 바닥까지 침잠하는
그 곳

어떠한 다른 우물로도
범할 수 없는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싶다

울어도 소리나지 않는
그 밑바닥에 갇혀서
몸부림쳐도 파장이 없는
절대 고독의 벽 속에서
내 안의 문을 열고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싶다

나는 때때로
나를
무너트리고 싶다
큰 소리로 와르르르
무너지고 싶다

단 한 번의 무너짐으로
단 한 번의 소리남으로
다시는 무너질 수 없고
다시는 무너지지 않고
다시는 무너지려 하지 않는
단 한 번의
울림이고 싶다
단 한 번의
완전한 파멸이고 싶다

완전한 무너짐으로부터
거듭 난 몸무게
먼지 하나 만큼에도
미치지 못하는 무게의
빛나는 입자로 일어서고 싶다.

 

 

[현대시]
 
우산이 되어
이복현
 
 

그대를 위하여
방패가 되어 살리
찬 비 오는 거리를
홀로 걷는 사람

모진 세상 바람 앞에
사나운 빗줄기, 눈보라 속에
길을 잃은 친구
그대를 위해
아낌 없이 내 날개를 펴서 두르리

언제나
그대가 가고 싶은
그 길을 따라서
내 갈비뼈가 흔들리고
가슴의 살점이 찢겨나갈지라도
그대의 아픔을 막아서며
그대의 슬픔을 감싸안으며
머나 먼 곳 까지 동행하리

비록,
비 개인 다음 날에
곧 버려지는
일회용 밀월이 될지라도
쓰임 받는 그 한 때
그 곳에서

순간을 영원 같이
그대의 아픔을 아파하며
그대의 슬픔을 슬퍼하며
그대의 행복을 꿈꾸며 살리.

 

 

[현대시]
 
어머니의 바다
이복현
 
 

어머니 살아 오신
그 큰 바다에
아름다운 노을이 오고 있군요, 어머니!

거친 바람이 불어 와도
노여움을 거두십시오
사랑하는 어머니!

슬퍼하지 마십시오, 어머니!
제가 당신의 바다에
섬이 되겠습니다
어머니, 제가 당신의 뱃길에
등대가 되겠습니다
가슴 무너져 내리는 하얀 분노도
제 무릎 아래 삭이십시오

소리 높은 물살의 아픔도
해저 깊은 침묵 속에
누이십시오, 어머니!
제가
당신의 바다에
섬이 되겠습니다
어머니, 사랑하는 어머니!
제가
당신의 길 위에 빛이 되겠습니다

당신의 흰 머리칼을 다듬어 드리는
바람이 되겠습니다
물결이 되겠습니다
남국의 소금냄새 물씬 풍기는
영원히 썩지 않는
노래가 되겠습니다

어머니, 사랑하는 어머니!

 

 

[현대시]
 
나를 향하여 외침
이복현
 
 

가거라, 낯선 곳
아득한 섬으로 떠나라
아무도 너를 기억하지 않는
아무도 너를 꿈꾸지 않는 별로,

떠날 땐 흔적을 남기지 말라
'그리움'이란 이름으로 씌여진 팻말
그 무수한 추락을 넘어서
빛의 퇴적층을 뚫고
온 몸으로 가라
오직 홀로
넉넉하고 가득한 그 곳으로...

이제 너를 버려라
시궁창을 거쳐
타락의 깊은 개펄 속에 누워 있는
너를 버려라

손을 뻗쳐, 한 때
심지를 돋우고, 한 없이
견딜 수 없는 몸짓으로 엎드려 울던
모든 욕망의 꽃들이 진 다음의
허망함을 만져보아라
그 거품 속의 까칠한 속살을,

그리하여 결국
너를 죽여라
진흙 속의 꽃으로
흙의 연인으로
부드러운 숨결 속에 녹아내리는
살과 뼈를 지닌
뜨거운 나무가 되어라

다시는 말하지 않는,
오직
희망의 손짓으로만 기쁨을
낚아올리는 나무, 나무, 나무,
그 무수한
뿌리가 되어라
잎이 되어라

그리하여 어느 날
꿈꾸던 것 들을 한꺼번에
우두두두 쏟아놓고 마는,
열매 주렁주렁한 그런
나무가 되어 있는 것이다.

 

[현대시]
 
휴전선에 핀 꽃
이복현
 
 

나는 죽어서도
이 고지와 계곡을 떠나지 않는
키 작은 꽃이어요
슬픔과 분노와 애증마저
뿌리 깊이 거두어
켜켜의 양분으로 쌓아 두고
사시 사철 꽃을 피워요
고백하고 싶었던 말들도 잊어버린 채
웃음 띤 얼굴로 서 있어요

우리들의 어버이, 우리들의 애인,
혹, 남기고 간 우리들의 아내와 자식들이
여기 와서 손 잡고 화해할 수 있도록
맑은 바람을 풀어놓고 있어요

내 발등과 옷섶 사이엔 새들이
평화의 둥지를 짓고
모여 살아요
개인 날 구름 위에 우리가
지쳐 못 다한 메시지들을
걸어놓으며
점.점.점. 날아가요

내 목숨의 빛깔과
사랑의 줄기와
고뇌하던 젊음의 푸른 잎사귀를 흔들면서
미풍이 일렁여요
향기를 퍼뜨리며
금수(錦繡)의 산하(山河)를 휘저어가요
마침내, 그대의 뜰에도 내 입김은
하얀 이슬 서리로 맺혀
돌아오는 가을의 언덕을
빛낼거예요
그대가 떠난 후에도
난, 늘
이 고지와 계곡에 남을 거예요

주검과 어둠의 그늘을 벗어나
그 날의 잿빛 절망을
말갛게 걷어내고
평화의 씨를 뿌리며
계절의 순환을 가꾸어 갈 거예요

산하에 일렁이는 저 바람의
가슴 벅찬 모국어를 들으며
환하게 웃을거예요
기쁨의 눈물을 닦을거예요
내 조국과
내 아들과
사랑스런 딸들을
생각 할 거예요
하루도 빠짐 없이 날 마다,
가슴 속에
푸른 일기를 쓸 거예요.

 

 

 

 

'추억[문학의 즐거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대시(제11목록-9편)  (0) 2009.09.01
현대시(제10목록-12편)  (0) 2009.09.01
현대시(제8목록-12편)  (0) 2009.09.01
현대시(제7목록-12편)  (0) 2009.09.01
현대시(제6목록-12편)  (0) 2009.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