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문학의 즐거움]

현대시(제8목록-12편)

로뎀추리 2009. 9. 1. 14:35

[현대시]
 
그런 주유소 하나 없을까?
이복현
 
 

세상 어디
바닥난 사랑.
바닥난 눈물을 채워 주는
그런 주유소 하나 없을까?

지치고 허기진 가슴
구멍 뚫린 갈비뼈 사이로
주유봉을 꽂으며
"얼만큼의 사랑을 넣어 드릴까요?"
하고 물어오는,

이 세상, 그 어디
바닥난 사랑, 바닥난 눈물, 바닥난 슬픔을
가슴 가득히 채워 줄
그런 주유소 하나 없을까?

 

 

[현대시]
 
겨울 여행
이복현
 
 

기차를 타고
눈 내리는 벌판을 미끄러진다

하늘과 땅의 경계마저 지워져 버린
아득한 지평에
오두막집 한 채

어느 노시인의
쓰다버린 파이프를 꽂아놓은 것 같은
굴뚝에서
희뿌연 연기가 솟아오른다

발가락이 붉은 새 한마리
젖은 날개를 털며
별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

눈보라 속으로
꽃뱀처럼
기적이 빠져나간다.

 

 

[현대시]
 
서시序詩 - 시에게
이복현
 
 

내가 너를 애인 삼기 전에
너는 이미
나의 애인이 되어 있었다

네가 나를 선택한 그 순간부터
나는 너의 아픔이다
나의 첫 언어를 간직하고 떠나는 너에게
화인(火印)이 될
한 아픔을 주고 싶다
아픔은 위대한
씨앗이 될 수 있으므로,

 

[현대시]
 
지붕 없는 감옥
이복현
 
 

햇빛 환한 여름 날 
강원도 어느 산골 화전민 
일구다 간  밭머리에 들꽃 몇 송이
심심한데 그 비탈 끝머리에 다
쓰러져 가는 너와집 한 채 있다

뒤란 모퉁이 장독대 자리에
떠날 때 남기고 간
두껑 없는 독 하나- 하오의 햇살 가득 채웠는데 
아까부터 신음소릴 뽑아내며 
그 속에 갇혀 있는 생쥐 한 마리
그 놈  전력을 다해 
수십 번도 더  탈출을 시도해 보지만 
이윽고 지칠 대로 지친 나머지 
털석 주저앉고 만다 
열린 지붕 위로 
푸른 하늘 솔개미만 내다 보일 뿐
아무런 구원의 가망도 보이지 않는다 

생쥐는 어쩌다가 
지붕없는 감옥에 갇힌 것일까
아무 것도 없는 빈 독 속에 
무엇이 그리워 빠져 들었을까?
언제쯤 SOS도 보낼 수 없는 
그 깊은 감옥에서 탈출 할 것인가?
난, 지금도
그 점이 여전히 궁금하다.

 

[현대시]
 
성화
이복현
 
 

기적 같이 가슴에 해가 솟으면 
온갖 어둠을 물리치고
찬란한 아픔 위에 수놓을 
진주 같은 기쁨

바람인 사람 
고요한 입술 속에 감추어진 키스 
오늘이 어제가 되어 사라지고
내일이 또 오늘이 되어 올 때
가슴에 품고 견디어내야 할,
아주 뜨거운, 
 

[현대시]
 
맑은 후 소나기, 비 온 뒤 갬
이복현
 
 

빛이 되어 
어둠의 뿌리, 어둠의 실핏줄 속까지 
뻗어 들어간다 

아직은 아무런 바램도 가질 수 없는 
비의 합창에 
풀잎가슴을 흔들어 깨운다 

노을 어린 숲, 오후의 언덕을 날아가는 새의 
순진한 눈동자
아, 푸른! 

 

 

[현대시]
 
허공에서 만나다
이복현
 
 

사라짐 뒤에 떠 있는 것
나의 주소
빈 가슴에서 잃어버린,

사랑 혹은 저주
이름 부를 수 없는 목소리 

 

 

 

 

[현대시]
 
지성, 혹은 어떤 실종
이복현
 
 

가느란 길 위에 반짝이는 
빛의 노래를 따라 부른다 

허무와 슬픔이 볼 비비며 이별을 나누는 
플렛폼에서
떠나는 기적소릴 듣는다 

종은 아직도 우리를 울리지 못하였고 
시간의 마디 마디마다
관절염이 생긴 지금
묻는다, 너는 어디 있는가고,

동굴 깊은 곳에서 불어온 바람이 
비척거리며 비명을 지르는
땅의 푸른 흔들림 속으로 
그림자 아프게 스며들고 있다. 
 

 

[현대시]
 
비를 기다리는 마음
이복현
 
 

난, 지금 
마른 나무가지처럼 목이 마르다
뼛속에 젖어드는 비라도 내려야겠다 
빗줄기가 내 뼛속 어디쯤서 휘파람을 불며 돌아다닐 때 
어쩜 와르르 무너져 내릴지도 모르는, 
그리하여 감추어 둔 모든 것이 일거에
들통나고 말지도 모르는 
내 슬픔의 뜰안에 
꽃씨 하나 가만히 젖은 혀를 내밀어 
무슨 새살 조잘댈 수 있도록... 

 

 

[현대시]
 
바람
이복현
 
 

깨우지 마라!
지쳐 돌아온 아이
관목의 숲속 깊은 여울에 잠든,

 

 

[현대시]
 
어느 겨울 저녁의 단상
이복현
 
 

낡은 버버리 깃을 세우고
눈 내리는 저녁 거리를 걸어가는 남자 
분주한 도회의 한 모퉁이를 
막 돌아나가는
바람의 뒷 모습 

사내는 자꾸만 길 속으로 
빠져들고
가면 갈수록 지워진다
 
이름을 알수 없는 새 한 마리    
공중에 길을 내며 
사내를 뒤쫓아
하늘 푸른 언덕을 넘어가고 있다
  

 

[현대시]
 
석양, 언덕에 서서
이복현
 
 

어머니를 불러보고 싶어서 
언덕에 섰습니다

내가 부르기 전에 
내가 먼저 말하기 전에 
종이 울고
비둘기가 날아갑니다 

목소리 닿지 않는 골짜기 
깊은 마을의 여울물소리 
오, 어머니!

내 생의 맨 처음에 
알수 없는 소리로 불렀던 것 같이 
마지막에 한번 더 
목놓아 부르고 싶은  
그 이름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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