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문학의 즐거움]

현대시(제11목록-9편)

로뎀추리 2009. 9. 1. 14:49

[현대시]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
이복현
 
 

보름달이
그대의 눈 속에도 떠 있는 걸 보고
사람의 눈도 얼마든지
하늘일 수 있음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아이들이 깨진 사금파리를 손에 들고
맨땅에다가 서투른 솜씨로
또 하나의
달과 별과 태양의 우주를
만들어가듯이
무한한 것도 더러는 종종
좁은 가슴 속 작은 손 끝 하나로도
만들어지는 것 임을 알았을 때
나는 새삼
사람이 신비스러울 만큼 아름답고
존귀한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다

언젠가
야윈 갈비뼈를 헤아리다가
잠이 든 적이 있었다

때로는 갈들에 피어 마른 꽃대처럼
쉬이 흔들리고 꺾이기도 하지만
눈 덮인 겨울이 다 풀리도록
언 땅에 발을 묻고
지친 풀더미 속에서 살아남은
온갖 잡초처럼
깊고 깊은 인내의 뿌리는
얼마나 숭고한 생명의 우듬지를
또 다시 우리 앞에 내어밀어
꽃피게 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바람앞에 몸을 낮춰 엎드리고 있을 때도
가슴속엔 늘
초록의 꿈을 간직하고
쉬임없이 줄기를 뻗쳐올리며
누리가 한 없이 매말랐을 때에도
활기차게 가지를 뻗고
물오른 순을 생각하며 다다른 곳에
봄은 반드시 기다리고 있으리란
생각은 늘 상식보다 굳건한
신념이었다

이처럼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목숨들은
반드시

뿌리 깊은 나무처럼
푸르른 봄을 맞이할 것이다
품에 깃든 새들은
긴 잠을 털고 세상 밖으로 나와
강팍한 땅에
노래의 씨앗을 뿌릴 것이다.

 

 

[현대시]
 
빙어(氷魚)
이복현
 
 

어항처럼
투명한 가슴을 지닌 물고기
숨 쉬는 심장 까지
환히 들여다 보인다

아무 것도 감출 것이 없는
순결함으로
아무 것도 감추지 않는
진실함으로
오직
한 사람을 향해 우러르며 바쳐졌던
고백과도 같이.

 

 

[현대시]
 
다시 사랑이고 싶다
이복현
 
 

처음사랑을 잃는 것은
깊이 박힌 못 하나를 뽑는 것이다
마지막 희망을 잃는 것은
북극성을 잃어버린 큰곰 별자리처럼
마음의 하늘에서 갑자기
별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다

나는 그대에게
다시 사랑이고 싶다
아픈 못자국을 메꾸워 줄 수 있는
맨 나아중 사랑

나는 또 다시 그대에게
희망이고 싶다
깜깜한 하늘 한 복판에
큰 별 하나를 매달아 줄 수 있는
맨 처음 희망

그런 詩이고 싶다
(詩는 사랑이고, 詩는 희망이므로).

 

 

[현대시]
 
다시 사랑이고 싶다
이복현
 
 

처음사랑을 잃는 것은
깊이 박힌 못 하나를 뽑는 것이다
마지막 희망을 잃는 것은
북극성을 잃어버린 큰곰 별자리처럼
마음의 하늘에서 갑자기
별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다

나는 그대에게
다시 사랑이고 싶다
아픈 못자국을 메꾸워 줄 수 있는
맨 나아중 사랑

나는 또 다시 그대에게
희망이고 싶다
깜깜한 하늘 한 복판에
큰 별 하나를 매달아 줄 수 있는
맨 처음 희망

그런 詩이고 싶다
(詩는 사랑이고, 詩는 희망이므로).

 

[현대시]
 
징검다리 위에서
이복현
 
 

징검다리를 건너는 일은
문득, 잃어버린
나를 다시 만나는 일이다

물 아래 흔들리는 내가
제 모습을 되찾을 때 까지
걸음을 멈추고
기도하듯 경건한 자세로
내려다 보고 있는
착한 마음

휜 구름 한 송이
그리운 사람의 손길처럼
물 밑을 닦아 간다.

 

[현대시]
 
낮은 골짜기로 내려가면
이복현
 
 

아무도 너에게 손 내밀지 않을 때
네가 먼저 손을 내밀어
따뜻한 악수를 청하여라
슬픔은 풍경 속의 강처럼
광야를 아름답게 꾸며 흐르고
그리움은 지는 노을처럼
네 꿈의 하늘을 적시리라

여리디 여린 물푸레나무 어린 가지처럼
네가 지금 흔들리고 있구나
바람이 분다는 건
어린 풀잎들이 손뼉을 치며 일어선다는 건
너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증거다
용기를 가지라고, 사랑한다고
신호하는 것이다

걸어가라
낮은 골짜기로
거기,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맑게 입 벌려 노래하는 시내 있고
숲 가득 향기를 토해내는
백합이 있는 것을 보게 되리라
풀섶에 숨어 피는 뫼꽃을 보고
침묵이 얼마만큼 아름다운 것인지를
배우게 되리라

 

 

[현대시]
 
나는 너를 깊숙이 받아들인다
이복현
 
 

나는 너를
내 안에 새긴다
순결의 터 위에 써 내려간
무언의 詩처럼,
눈밭을 밟고 간 첫 발자국처럼,

나는 너를
내 안에 깊숙이 받아들인다
말줄임표만 아득히 찍혀 있는
안개의 詩行처럼,
평생에 걸어야 할 숙명의 길처럼.

 

[현대시]
 
그림자 보다 더 빨리, 어둠 보다 더 깊이
이복현
 
 

이제, 알아야만 해요
밝은 세상에서 그토록
줄기차게 당신을 뒤 따르던 그림자도
당신이 어둠에게 점령 당했을 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는 걸,

하지만 나는
그림자 보다 더 빠르게
당신의 길을 예비하겠으며
당신이 빛 가운데 있거나 어둠 속에 있거나
위안자가 될 것입니다

길이 어두우면 빛이 되어 드리고
빛이 눈부시면 그늘이 되어
아픔을 어루만지며
슬픔을 잠재우겠습니다.

나는 눈물 보다 더 멀리 흐르는 강이요
슬픔 보다 더 깊은 우물입니다
내 우물에서 길어낸 슬픔은
당신의 목마름을 적셔 줄 것이며
눈물은 그대 영혼의 강심을 흘러
낙원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나는 그림자 보다 더 빨리 닿고
어둠 보다도 더 깊이 내려가
당신의 길을 열어놓고
종일 기다리겠습니다.

 

 

[현대시]
 
마음의 골짜기
이복현
 
 

봄이 오면
어린 아그배 묘목 한 그루를
손에 들고
그대의 마음 속으로 걸어 들어가겠습니다

잔설 아직 남아 있는
깊은 골짜기로 내려 가
무성하게 잎 피울 그리움 한 그루
가만 몰래
심어두고 오겠습니다

어느 날 문득,
가슴 저 안쪽으로
봄의 문이 열리고
종달새 높이 날아오르며,
이제 막 눈 뜬 어린 나방들이
애벌레집에서 푸득프득 깨어날 때
묵은 나무 가지 마다
눈송이 보다 흰 소망을
송이 송이 피워올리겠지요

마을 앞 무논배미 한 귀퉁이에
하나, 둘 올챙이가
꼬리를 달고 눈뜰 때쯤

아직
입술을 열지 않은 꽃모종 하나
손에 들고
그대 마음 양지바른 기슭에
가만
심어두고 가겠습니다

세월이 강처럼 흐른 뒤
성큼 자란 아그배 나무엔
고만 고만한 열매들이 달리겠지요

꽃들은
나비들을 유혹하는 환한 미소로
기나긴 키스와 포옹을 하며
마음껏 사랑을 유희하겠지요

먼 훗날, 문득
어른이 되어버린 아그배나무
그늘 아래 서서
모른체 지나가는 당신을 불러 세우고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지요

"오, 아름다운 열매여!
이것은 그대의 가슴 속에서 자란
나의 조그만 꿈이랍니다
맛보십시오
내 꿈의 달콤함을," 이라고,

그리고 또 말하겠지요
꽃의 언덕에서, 속삭이듯이
"만져보십시오, 이것은
당신이 내게 준 맨 처음 키스로
가슴이 데인 자리,
불의 흔적입니다
아직도 식지 않은 그대의 체온입니다"
라고...

 

 

 

[현대시]
 
우체국이 없는 나라
이복현
 
 

난 지금
우체국이 없는 나라로 편지를 쓴다.
아직 아프게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무백(無白)의 흰 벌판에
가슴으로 쓰는 글

엊저녁, 눈이 내린 다음으로도
빈 가지를 울리던 높바람은 여전히
흐느끼는 갈대의 울음소리로 가슴에 남아
잿빛 하늘을 흔든다

찢어진 채 펄럭이는 깃발은
수평선을 향하여 고개 들고 일어서고
나는 항구를 찾아 가는 표류선과도 같이
그대의 가슴을 찾아 간다

이런 날,
닿지 않는 편지를 쓴다는 건  슬프다
기대할 수 없는 답신의 편지는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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