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문학의 즐거움]

시론(6편)

로뎀추리 2009. 9. 1. 14:57

[시론]
 
생명사랑과 화해-이복현시집[따뜻한 사랑 한 그릇] -(문학평론가, 정한용)
이복현
 
 

 
  **생명사랑과 화해 

            정한용(시인·문학평론가) 
 
이복현 시인은 비교적 늦은 나이에 문단에 나왔다. 그래서인지 요즈음의 20대 초반에 
등단하여 팔팔한 감성으로 언어를 쏟아내는 젊은 시인들과는 조금은 다른 그만의 시세 
계를 보여주고 있다. 
우선 젊은 시인들이 흔히 가질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저항의식보다는 삶에 대한 농익은 
사유의 깊이를 천착하며, 인생과 자연을 통해 슬며시 배어 나오는 섬세한 맛에 더 관 
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꼽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의 시가 지니는 미덕은 언 
어가 정결하고 깨끗하며 감성이 풋풋하여 늦은 나이를 불식시키고 아름다운 시편을 뽑 
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만 더 든다면 이복현 시인은 슬픔과 절망을 이야기하면서 
늘 그 밑을 받치는 힘, 즉 삶의 근원에는 사랑과 화해가 자리잡고 있다고 믿는다. 그 
만의 장기이다. 그것은 곧 슬픔과 고통과 절망을 건너 희망을 잉태하고픈 시인의 간절 
한 소망을 드러낸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세계의 화해를 통해 지상의 평화를 구축하는 
것이다. 즉 인간과 자연과의 화해, 삶과 죽음과의 화해를 갈망하는 것이며, 이러한 화 
해를 통해 하나의 평화를 이끌어내려는 것이다. 
아픔과 절망을 초극하고 삶을 평정으로 바라볼 눈을 갖는다는 것은 꼭 시인이 아니라 
도 행복한 일이다. 삶의 목표는 결국 행복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행복에 진정 다다른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이 시인의 시를 읽고 그를 따라가는 일은 그래서 고요한 세계, ' 
신성한 숲'을 향한 오솔길을 걸어가는 것이 된다. 

임부의 자궁처럼 아늑한, 오늘밤 
너를 닮은 예쁜 별 하나 
잉태하고 싶다 
…(중략)… 
산과 들의 온갖 금수들 목마름 
다 적셔주고도 
아직도 맑게 솟구치는 
깊은 산 속의 
숨어 있는 샘물처럼, 그렇게 
끝이 없이 솟구치는 사랑 하나 
만나고 싶다 
―[녹슬지 않는 사랑] 중에서 

이 작품에서도 잘 알 수 있듯, 시가 매우 단순하고 이해하기 쉽다. 그래서 이 시인의 
시에는 그렇게 난해한 이미지나 현학적인 시어, 복잡한 구조나 상징이 나오지 않는다. 

일단 독자들은 빠르게 작품의 내용을 수용할 수 있고, 따스한 정감을 느낄 수 있다. 
작품의 메시지는 아예 이 시의 끝에 직접 다 드러난다. '네 꿈의/ 높고 푸른 하늘복판 
에/ 영원토록 반짝이는 빛이 되도록' 사랑을 베풀고 싶다는 소망 아닌가. 그런데 그 
사랑의 정체성 속에는 '깊은 산 속의/ 숨어있는 샘물'이라는 속성이 있다. '산과 들의 
온갖 금수들 목마름/ 다 적셔주고도' 여전히 솟아나는 샘물, 그것은 바로 생명에 대 
한 끊임없는 사랑의 염원과 다름 아닐 것이다.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선명하게 묘사한 이런 작품도 있다. 

대견하여라 

절개지 붉은 상처 위에 
갓 피어난 애기똥풀 하나 

홀로 바람에 떨고 있는 
작고 안쓰러운 것이 
인간이 짓밟고 뭉개어 놓은 
지구의 상처부위를 
향그럽게 수놓고 있다는 이 사실! 

놀라워라 

실오라기 같은 그 뿌리가 
거대한 대지의 동맥에 접속되어 있어 
푸르게 맥박치면서 
불어오는 바람을 견디어내느라 
안간힘으로 일어서는 모습! 
―[애기똥풀 하나] 

흙을 파헤치고 산을 깎아 내린 절개지에 애기똥풀 하나 갓 피어난 모습을 그리고 있다 
. 이 애기똥풀은 그 이름처럼 흔하고 천하게 여겨지는 풀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시 
인의 눈은 애틋한 정겨움, 또는 생명에 대한 경외감에 젖는다. 그 작고 보잘 것 없는 
풀꽃과 대비되는 인간의 폭력성이란 얼마나 무자비한가. 생명의 터전을 파괴하는 인간 
에 비하여, 그 '상처부위를/ 향그럽게 수놓고 있는' 풀의 끈질긴 생명치유의 복원력은 
얼마나 위대한가. 비록 '실오라기'처럼 가냘프지만 인간이 찢어발긴 대지의 깊은 '동 
맥'에 접속하여 불어오는 바람을 당당하게 견디어내는 풀인 것이다. 
생명은 그 자체로 신비롭고 위대하다. 그러나 생명이 우리에게 그런 신비함을 주는 이 
유는 생명이 어디에서든 피어난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고통과 죽음을 딛고 
일어선다는데, 그러면서도 그 힘든 역정을 탓하기보다 새로운 질서 속에서 겸손히 스 
스로를 감춘다는 데 있다. 시인은 '하지만, 탄생이란/ 얼마나 경이롭고 숭고한 것인가 
/ 고통과 인내 없이 얻을 수 없는/ 생명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내 안에 갇힌, 벌 한 
마리]에서)라고 노래한다. 환경이니 생태니 하는 어려운 말을 빌리지 않아도, 시인이 
세상의 사물을 바라보는 척도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게 해 준다. 
이복현 시인의 세계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바로 삶에 대한 따스 
한 연민이다. 한 작품을 더 읽어보자. 이 시집에 들어 있는 작품 중에서 가장 빼어난 
것의 하나로 나는 이 작품을 꼽고 싶다. 

누구에게나 차별을 두지 않고 
지쳐 돌아온 삶을 
편안히 받쳐주었던 자비의 
한 생애도 낡아 
이제는 삐걱거리는 아픔으로 
관절염을 앓고 있다 

세월이 깊어갈수록 
이별이 가져다 준 슬픔의 무게를 
견딜 수 없어 
의자는 가만히 
입술을 깨문다 
―[낡은 의자] 중에서 

이 작품은 아주 천천히 읽어야 제 맛이 난다. 긴 작품은 아니지만 거기엔 의자의 한 
생애가 담겨 있다. 아마 삐걱거리는 것으로 보아 나무의자가 제격일 것 같다. 처음엔 
니스칠로 반짝반짝 광택이 났을 의자, 많은 사람들이 주인이 되어 앉았다 떠나가고 그 
러면서 조금씩 조금씩 낡아갔을 의자, 미세하게 틈이 벌어지고 세월의 먼지가 틈새로 
스며들면서 반짝이던 빛을 잃어버렸을 의자, 자신의 젊고 탱탱하던 힘을 스쳐지나간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씩 나눠주고 이제는 관절염을 앓고 있는 의자, 사랑이 다 떨어져 
나가고 이젠 '슬픔의 무게'만 남은 의자… 그런 의자가 하나 여기 있다. 이 의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어 이제는 슬픔 외에는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어 보인 
다. 그러나 가만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그는 '침묵의 시간'과 '지나온 내력'을 마 
음에 새기고 있다. 베품으로써 그에겐 '무게'가 남았다. 이 슬픔은 '따뜻한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마음이 따뜻함으로 꽉 차는 걸 느낀다. 저 
의자의 삶이 나보다 낫구나! 
따뜻한 연민, 이런 말이 정말 가능하리란 걸 이복현 시인의 작품을 읽으며 생각한다. 
이 시인의 세계를 구축하는 두 개의 시어는 '사랑'과 '슬픔'인데, 이건 사실 서로 다 
른 게 아니다. 한 몸이다. 이 둘을 하나로 잇는 고리가 바로 따뜻한 연민이며, 시인이 
세상을 해석하는 출발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시집에는 종종 어머니를 비롯한 유 
년에 대한 회고의 작품들도 보이고, 새를 소재로 한 자족의 시편들도 보이는데,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어머니/ 그 체온 같은/ 사랑 한 그릇/ 지금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따뜻한 사랑 한 그릇]에서)는 과거에 대한 연민으로 슬픔을 정화시 
키고자 하는 의도이다. "호주머니 가벼이 빈손 찌르고/ 입장료 한 푼 없는 공원길을/ 
산책할 수 있으며/ 공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누릴 수 있으니/ 부자가 아니라도 행복하 
다"([부자가 아니라도]에서)라고 쓸 때는 타자의 연민이 자아를 동화시켰다는 의지의 
역설이다. 
이 시인은 행복한 시인이다. 나도 시를 쓰지만, 내가 쓰는 시가 늘 어둡고 축축하고 
고통에서 허우적대는 것과 비교하면, 이 시인은 정말 행복하다. 그가 부럽다. 

 

 

[시론]
 
공간개념을 초극한 자아의 발견
이복현
 
 


[발제:권혁웅]

작품 집중 토론 코너의 이번 주인공은 임미영 동인입니다. 

[그는 지금 출장 중]은 사실은 不在가 아니라 臨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시인은 모든 곳에서 <그>의 부재를 보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부재를 통해서,
<그>는 바로 지금, 이곳에 있습니다. 시인이 드는 부재의 긴 목록은, 그러니까
<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인 셈이지요.
시인은 이 목록을 통해서, <그>의 입을거리, 먹거리, 목소리, 사랑 등을 되살려냅니다.
우리가 그리움이라 부르는 마음의 어떤 움직임이 사실은,
현존의 형식이라는 것을 이 시는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만 <일상>과 <일탈>을 지정하는, 이 시의 21-24행은 
이미 본문 속에서 충분히 언급된 게 아닐까요?)

임미영 시인의 다른 시들을 포함하여,
이 시를 논의했으면 좋겠군요.
여러분의 의견을 기다립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는 지금 출장 중

            임미영


그의 부재가
옷장 안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냉장고 속 
허옇게 눈감지 못하는
조기 대가리 
구슬구슬한 슬픔에도 남아 있고
여닫이 방 문틈에 끼여 
채 빠져 나오지 못하던 
굵고 황급한 음성의 환청 속에도 있다
더 이상 쌓이지 않는 키 큰 빨래
돌돌 말린 양말도 출장중이다
균형을 잃어버린 시계와
시도 때도 없이 앙앙대는 
아이들 투정 속에도 그가 있다
그의 부재가 있다
늦은 밤, 머리맡에서 편지를 쓴다
미루어 놓았던 말 한마디
추신 자 옆에 비스듬히 눕힌다 
그도 내 곁에 비스듬히 누워
이 글을 읽을 것이다
일상에서 벗어난 그를 
내가 더 기억하는 것처럼
일탈의 이 글을 
그가 반길 것이라 믿는다
내 마음은 지금 그에게로 
출장중이다


*********************************************************************************************


  공간개념을 초극한 자아의 발견   

                        이  복  현



임미영시인의 눈은 늘 세계의 바깥보다는 오히려 안으로 향하여 있는 듯 하다, 동시각적 차원에서의 
존재 의미는 공간적 문제를 이미 벗어나 있다. <그>가 거기 있으나, 여기 있으나 있음에 다를바 없다.   
내가 <그>를 인식하고 느끼므로서 <그>는  비로소 내 안에 존재하하는 것이며, 아무리 근접해 있어도 
의식속에서 <그>의 존재가치를 깨닫고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는 사실 <그>는 자신의 세계 속에  없는 것이다.     
 임미영시인의 발제 시를 읽다보니, 김춘수님의 시 <꽃>이 떠오른다.  물론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시적 거리가 조금은 다를 수 있다 . 이미영 시인이 출장중인 <그>의 존재적 의미를 자신의 내면세계로 끌어들여, <그>를 느끼고 생각 할 때, 그는 이미 공간을 초월하여 시인의 내면에 사실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자신에 내재하는 <그>를 발견하고, 그에게 대화를 건넬 때, 시인은  바로 <그>라는 거울을 통하여 자신의 존재영역을 확인하는 셈이다.    
시인이  추신자 옆에 불러 눕힌 그 말들은 사실 자아의 또 다른 모습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자아와 아주 가까이에  <그>를 불러 나란히 눕히는 시인의 마음은 , 단순한 그리움의 세계를 
초극한 <나>와<그>의 합일점, 혹은 동류항을 이룬것이라 보여진다.
이렇게 볼때 ,임시인의 다른 시편에서도 간간히 읽어낼 수 있는 점이지만 , 임시인의 시를 통해서 우리는 
임시인의 성숙한 내면의 세계, 성실하고 진실된 면을 엿볼수 있다 . 한 번도 만나 본 적은 없지만 분명, 두터운 인정을 지닌 분일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자기성찰을, 할 줄 아는 , 늘 뒤돌아볼 줄 아는 
겸손도 아울러 지닌 분일거라는 생각이다. 
 다만 이 시(발제 된)에 있어서는 주제를 둘러싼 시어의 나열이 너무 반복적이고 지루하게 늘어져 있다보니, 긴장감과 산뜻함을 줄어들게 하여 자칫 지루한 느낌을 줄 수도 있으리란 점이다. 
또한 권혁움님께서도 발제의 변에서 짧게 언급했지만, 시의 결미부분을 좀더 생략했더라면  훨씬 더 
주제에 대한 의미의 상승효과를 가져올 수 있었으리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임시인은 그동안 독자문단에도 많은 시를 올리는 가운데, 끊임없이 고른 수준의 좋은 작품을 선보여 온 것으로 알고 있어 믿음이 가고, 시적 안목의 폭이 넓고 깊어 앞으로 더욱더 훌륭한 작품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으리라 확신하는 바이다.  


 

[시론]
 
삶과 여정, 피안을 바라보는 눈
이복현
 
 

   박제영:  [발제 시5] 김기연, 의자 1 ┼ 
│ 시인의 질료적 상상력이 닿으면
│ 딲딲했던 사물들은 어느새 물렁물렁해지고 
│ 이윽고는 풀어져 새로운 생명의 날개를 얻으리라.
│ 
│ 김기연 시인의 질료적 상상력이 의자에 닿았다. 날개를 얻은 의자는 어디로 날아갈까...
│ 
│ 김기연 동인의 시, [의자 1]을 다섯번째 발제시로 올린다.
│ 
│ [빈터]동인들은 물론 독자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기다리면서...
│ 
│ 
│ -------------------------------------------------------------------------
│ 
│ 의자 1   
│ 
│    김기연
│  
│ 끝이 없는 사다리처럼 자욱한 안개 속으로 
│ 사라진 기찻길을 따라 걷다가 
│ 잠시 이름 없는 간이역으로 쉬는 곳 
│ 아무도 들른 흔적 없는 
│ 대합실 창가 아래 놓인 긴 목재의자에 
│ 신원증명서류 뭉치 같은 몸을 눕힌다 
│ 천장 구석에 집을 짓고 있는 거미가 경계하는 것은 
│ 낯선 길의 진득한 마수에 걸려든 나의 몸부림
│ 배고픈 아이의 종아리처럼 가냘픈 목소리는
│ 저 안개 너머에서 들려오는 풍경 소리를 찾아 
│ 떠나야 한다 외치고 있을 뿐 
│ 듣는 이 없는 자갈밭 위의 발자국들, 
│ 흔들리는 동공 
│ 이대로 잠이 든다면 
│ 나는 벌레들의 안락한 집이 되어
│ 서서히 스스로 그린 무늬들을 지워가겠지
│ 그 안락한 의자에서 일어나 
│ 다시 철길을 밟아 올라 갈 때까지는

 
************************************************************************************************


삶과 여정, 피안을 바라보는 눈   


                     이  복  현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분명 같은 존재일까? 나는 지금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나 아닌 무언가가 가만히 있는 나를 스쳐 지나가는 것일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혹은 그 밖의 모든 것이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달려온 길 .. 길을 길이라고 생각할 틈도 없이 인식의 밖을 떠돌다가 돌아온 자리-- 거기서 새삼 나를 꼼꼼히 점검해 본다. 사실 내가 변화하였던지 그대로이던지 간에 나는 다만 현재의 나일 뿐이다.  어느 시골 간이역, 역사 안에 감도는 고요, 저쪽에 서 있는 역원의 숨소리가 전해오는 그런 곳. 편안히 눕는 긴 의자.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조차 흔치 않는... 우리는 거기서 우리 생의 한 휴게점을 발견한다. 사실 우리에게 진정한 안식이란 얼마만큼의 분량으로 주어졌던 것인가?
김기연 시인의 시는 넓은 시각 으로 삶을 관조하는 눈이 있다. 평범하고 어눌한 것 같은 시어의 나열 속에 예기치 못할 비범함이 숨어 있으며,  함부로 간과할 수 없는 어떤 불가결의 화두를 제시한다.     
 삶이 의미하는 여정, 그건 고달프고, 때로는 삶의 경계 바깥을 넌시지 넘보기까지 하는 그런 것이 아닐까? 지치고 고독한 여정 속에서 나그네는 안식을 그리워 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안식이 나그네가 바라는 궁극의 어떤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다만 어떤 안식 이상의 것을 찾아가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다. 하여튼 그것이 무엇이던 간에 우리는 지친 몸을 일으켜 어디론가 행진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되어있다.
김기연의 시에서 대합실 창가에 놓인 목재의자,  안개 속으로 사라진 기차길 ,
안개 너머에서 들려오는 풍경소리는 무얼 의미하는 걸까? 그 점은 시 속의 그의 상상력과도 잘 연결된다 
예를 들면  발제한 시의 뒷부분에 '' 이대로 잠이 든다면 / 나는 벌레들의 안락한 집이 되어/ 서서히 스스로 그린 무늬들을 지워가겠지''라고 한 것은 삶의 경계 너머의 피안을 그리는  마음속 그림인 것이다.  
그건 우리의 실제 여행과 그 여행과정에서 겪게되는 갖가지 경험들이 우리가 거시적 안목에서 살핀 전체의 삶과 닮음꼴일거라는 것으로 나는 해석한다. 단순히 그런 생각 그런 비교만으로 부족하다고 한다면, 너무나 평범한 이치에 따른 해석이라 한다면,  그래도 나는 더 이상의 할 말이 없다.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건 휴식이다. 그렇지만 그런 휴식은  언제 올 것인가?  
그 건 아마 다시 철길을 밟아 올라 가다가 멈추게 되는  지점이 아닐까?  그 곳이  또 다른 안개 속의  간이역이던,  알지 못할 종착역이던,  걸음이 멈추는  곳.  그 곳일 거다. 하지만 우리가 떠난 자리에 남을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김기연의 시는 우리의 삶을 거시적 안목으로 돌아보게 한다.  미래를 가늠하며  삶의 회로에 놓인,  피할 수 없는 것들을 점검하게 한다. 그런 면에서 진지함과 애곡함이 깃들어 있는 성찰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시에서-- 간이역의 고요 속에 있는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듯 시인의 더듬이로서 우리 자신을 재점검하는 한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만을 두고 볼 때 단지 하나 아쉬운 점이라면, 시 제목이 가리키는 쪽으로 시의 초점이 모아지기 보다는 오히려 그 바깥 쪽에 더 비중이 실려있다는 점일 것이다. 의자가 우리에게 던지는 어떤 의미에 더 충실하였더라면  하는 점이다. 나의 짧은 생각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또 시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헛다리를 짚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이해하기 바란다.  
모쪼록 그의 시가 더욱 탄탄한 바탕과 팽팽한 긴장으로 이어져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을 것을 기대한다. 그리고 김기연 시인은 충분히 그러한 역량과 자질을 갖춘,  보기 드문 우리시대의 시인임에 틀림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거는 기대가 자못 크다. 그 것은 그에게 앞으로 그만큼의  더 많은 노력을 요구한다는 또 다른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시론]
 
꿈의 석방을 선언할 때를 함께 기다리며..
이복현
 
 

[발제-04] 류외향, 꿈꾸는 얼음   

대동강 얼음도 풀린다는 우수가 지났으니, 
아침부터 내리는 저 비는 봄의 전령이리라.
눈도 녹고 얼음도 녹고 뚝뚝 떨어져 흐르는 물들....

류외향 시인의 시심이 닿은 곳은 어디고, 그의 꿈길의 무늬는 무엇일까...

류외향 동인의 시, [꿈꾸는 얼음]을 네번째 발제시로 올린다.

끌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얼음 속 그 투명한 무늬를 보기 위해서는...

-------------------------------------------------------------------------

꿈꾸는 얼음   

             류  외  향

창밖 풍경이 황량하다,라고 말하고 나는 잠잔다 긴 꿈의 강
은 얼어붙어 흐르지 않고 남쪽으로 날아가지 못한 철새의 가족
들, 얼음조각을 물어와 집을 짓는다 언제부터였던가 내가 떠나
보냈던 얼굴들이 거기 유골이 되어 붙박혀 있다 푸른 유골들, 
춥다고 눈을 뜨며 달려오고 나는 아직도 온기 남아있는 유골을 
끌어안고 비로소 깊은 잠을 잔다

나, 계곡과 하늘을 오르내리는 동안 가슴은 비어간다 빈 방
에 철창 하나 달고, 지난 계절 상처 입은 것들에 대해 무심히 
조서(調書)를 쓴다 적당한 긴장과 적절한 거짓을 섞어가며 찬 
바닥에 따뜻한 요를 깔고 빈 천장에 형광등을 단다 그래도 창
살 틈을 기웃거리는 꽃잎과 바람과 잎새, 그럴 때마다 나는 내 
속을 다 헐어내고 싶어진다 내 남은 그리움마저 픽션이라고 믿
어버리기 전에. 누구든 꿈꾸는 자는 유죄다

사람들은 내일을 살지 않는다 다만 살아보지 못할 날들을 그
리워할 뿐이다 미래는 너무 멀거나 너무 가깝다 이따금 내 꿈
은 부르튼 입술로 얼음 깨어지는 소리를 낸다 마냥 겨울뿐인 
지대처럼 조금씩 녹았다가 한꺼번에 얼어버리는 꿈, 그렇게 무
거워진 몸으로 어디까지 왔는가 오긴 왔는가 돌아보니 빙판 위
에도 발자국이 찍혀 있다 문득 작은 새 한 마리 물고기를 입에 
물고 얼음집으로 들어간다 언젠가는 남극에서 떨어져나온 빙산
이 여기까지 오리라



*****************************************************************************************************



꿈의 석방을 선언할 때를 함게 기다리며--  

                        이 복 현

 

류외향 시인은 어쩜 나와는 각별한 인연이 있는 것 같다. 같은 해에 대산문화재단의 지원사업을 통해 처음  만나게 되었고, 또한 지금에 있어서는 나란히 빈터의 동인이 되어 있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그녀를 만나 오랜시간 이야기를 나누거나 서로의 시세계에 대하여 진지한 담론을 펼진 적도 없었다. 
오직 지면을 통하여 서로의 작품세계를 엿보고 격려할 뿐이다. 
이제, 순전히 발제된 그녀의 작품과 그녀가 지금까지 발표하고 보여준 몇편의 시적 경향을 아우러서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과  해석으로서 그녀의 시세계를 엿보기로 한다, (단, 다른 작품에 대한 개별적 열거는 생략함) 
이것은 어디까지나  필자의 주관적 해석에 기저하므로 독자 여러분이 부분적으로 공감하거나 동의 할 수도 있겠지만 또한 여러분의 독자적 해석이 필요하리라 본다. 
.....................................
시인 자신의 손에 들린 영혼의 거울에 투영된 시인 자신의 모습! 그건 차갑고 투명하고 고체화된 모습이다.  시인은 자신의 내면에 얼어붙은 꿈이 용해되기를 기다린다. 시인은 싸늘한 현실을 끌어안고 잠들지만  늘 흐르지 못하고 안타깝게 얼어붙은 현실에 대해 절망하지 않고 기다린다. 마치 따뜻한 남쪽으로 떠날 기회를 잃어버린 철새가 얼음집을 짓는 것처럼 ...시인은 꿈을 꾼다 , 그 꿈은 따뜻함을 찾아가는 꿈이며, 생명이 없는 유골처럼 싸늘하고 처연함을 끌어 안고 잠들지만 결국 시인은 그 자신이 따뜻함으로 녹아 흘러 모두에게 그 따뜻함을 나누어 주고 , 자신이 하나의 얼음조각이 되어 박제시킨 꿈들을 자유로운 세계로 해방시키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꿈꾸면서 스스로 꿈꾸는 자의 유죄를 선언한 것이다. 그것은 시인이 자신의 내면세계를 거울에 비쳐보듯 투영해 보지 않고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의 조서에 쓰여진 자아 읽기... 그것은 자신에게 긴장과 거짓으로 읽힌다 , 시인은 내면에 남아있는 마지막 그리움을 붙들고 싶어한다 . 그 마지막 그리움을 픽션이라고 믿고 싶지 않고, 그래서 그 그리움이 아직 픽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아슬아슬한 지금, 자신의 내면세계를 헐어내고 재구성하고 싶어한다. 

시인을 포함한 우리는 늘 내일을 말하지만 언제나 현재인 오늘만을 살고 있는 것이다.  내일이 오늘이 되어 엄연한 현실로 나타나기 까지는 늘 하나의 꿈으로 남아 있을 뿐인 것이다. 

시인은  철새처럼 따뜻한 영혼의 고향, 남쪽나라를 그리워 하면서도  결국 이 차거운 현실의 얼음집에 남지 않으면 안 된다. 
시인은 그러한 현실을 안타까와 하면서도 그리움을 찾아 떠나지 못하는 어쩔수 없는 현실과 하나로 고체화 된다 . 그녀의 꿈은 고체화된 꿈이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그 고체화된 꿈 속에서 또 다른 꿈을 꾼다 .
그것은 그리움이 내게로 흘러 오기를 기다리는 안타까운 꿈이며, 그러므로 그의 꿈은 어디까지나 꿈이니 만큼 , 때로는 꿈 속에 얼음 깨어지는 소리를 듣기도 하는 것이다. 
시인은 언제일지 모르나, 그렇게 되리란 걸 어느 정도 믿고 싶어하며, 그런 신념의 바탕 위에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새로운 기운이 언젠가는 꿈의 덩어리인 시인 자신을 녹여 꿈과 그리움이 픽션이 아닌, 논픽션이 될 것이라 믿는 것이다. 투명하고 아름다운 시인의 고체화된 꿈은 어쩜 처연한 슬픔의 빛깔로 우리에게 다가서기까지 한다. 이러한 시인의 고체화된 꿈이 따뜻한 온기를 만나 언젠가는 스스로 꿈의 석방을 선언할 수 있기를, 자신을 향한 유죄의 조서를 더 이상 쓰지 않아도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한마디로 , 류외향시인의 시는 발제의 시 외에 다른 시편들과 함께, 맑고 깨끗한 심성에서 우러나오는 
물줄기와도 같이 우리의 마음을 적셔주곤 한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시는  늘 동경의 세계를 지향하는 경향을 띠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녀는 현실적 경험의 세계를 구체화 하기 보다는 현실 속의 경험에 관한 느낌과 바램을 오버랩한 추상화를 그리기를 즐긴다 , 그러면서 그 즐거움을 관객이나 독자와 함께 나누어 갖기를 바라는 기저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 시가 갖는 묘사의 구체성을 결하기 쉽다는 단점이 있을 수 있고 시가 난해하게 되어, 공유의 폭이 좁아지고, 자신만을 위한 시가 되기 쉽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녀의 깊은 시세계를 탐사해 들어가면 깊고 오묘한 즐거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그녀의 시에 있어서의 두 가지 잣대를 어떻게 계측하여야 옳은 것인가? 그것은 순전히 시인 자신 뿐만 아니라 독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달려있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시론]
 
<짧은 한 마디 > 생에 대한 진지한 성찰, 잘 우려낸 뼛국물 같은,
이복현
 
 


박제영:  [발제-03] 김종보, 항해일지   

아침부터 폭설이 내린다. 어느새 길은 눈밭이다.
눈위의 길 너머 누군가 카론의 배를 타고 있지 않을까.
그의 영혼이 남긴 몇개의 발자국들마저 지워지고 있겠지. 저 눈 속에...

김종보 시인의 시, [항해일지]를 세번째 발제시로 올린다.

그의 시는 저음이다. 때때로 가청음역을 벗어나기까지 하는 그의 시를 듣기 위해선
낮게 엎드려야 하는 것은 아닌지...

-------------------------------------------------------------------------

항해 일지 

           김종보   

영안실 뒤뜰에 노아의 방주 떠 있다.

들어선다.
뒷굽 안쪽까지 젖은 구두는 벗어두고
벌써부터 구김살이 움켜쥔 넥타이는 풀어둔다.
없는 게 없다.
뻘건 국물엔 오늘 아침 잡았다는 소의 옆구리가 뜨고
붉은 화투패에선 화사한 꽃들이 피었다 진다.
환호성도 터진다.
투망한 화투패로 한 두릅 싱싱한 지폐를 낚아 올리고
푸른 새벽이 와도 충혈된 눈은 감길 줄 모른다.
기우뚱! 기울어진다.
배가 세찬 풍랑을 만날 때마다
승객들은 기우는 쪽으로 쓰러져 불편한 새우잠이 든다

이제 나서야 한다.
뒤엉킨 신발 속에서 용케 딱 맞는 구멍을 찾아내고
아직 하품이 덜 끝난 구두 속에 발을 쑤셔 넣는다.
어디로 가는가?
몸무게라도 재듯 잠시 구두 속에 서 있으면
어느새 내 몸은 긴 돛대가 되어
255미리 배 두 척 끌고
또 어디로 힘겨운 출항을 하려는가?
허공을 떠가는 고인의 배 한 척,
상주는 발인을 걱정하는데 빗줄기는 굵어진다.

다시 삶으로 회항할 수 있다면    


**************************************************************************************


 짧은 한 마디...   

             이  복  현

김종보, 그의 시에는 생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깃들어 있다. 비단 발제의 '항해일지' 뿐 아니라  그의 시 전편을 흐르는 인상은 우리 삶의 뒤란에 숨겨져 있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낮은 곳으로 조심스럽게 끄집어 내어 깊은 애정을 가지고 관찰하는 진지함과 숙연함이 있다. 
그의 시는 마치 잘 우려낸 뼈국물 같다고나 할까? 그의 영혼이 얼마나 진실되고  투명한지를 알 수 있다.

이상으로서 발제의 시에 대한 논지는 다른 여러 좋은 글이 올라와 있어 더 이상의 긴 사설을 생략하고자 한다. 



 

[시론]
 
<감상> 추억의 필름을 재현시킨, 애틋한 풍경
이복현
 
 

┼ 정한용 : [발제-02] 민완순, 파꽃이 지다 ┼ 
│ 낮게 가라앉은 웅얼거림, 조금 떨리면서, 독백처럼 뱉어내는 그 소리에는
│ 신들린 영혼의 어둔 그림자가 묻어있다. 
│ 이 한편에 매혹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 
│ --------------------------------------------------------------------------
│ 
      파꽃이 지다

               민완순

│ 
│   면허 시험장 근처 공터에 약장사가 매일 왔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구경 가시는 어머니는 봄볕에 검게 그을려 있었다 굽은 허리로 몇 번을 쉬었다가 가신다 돌아 오실 때마다 바가지에 간장이 손에 들려 있지만 그래도 특별히 자신에게만 주었다는 약봉지를 꺼내며 자랑하셨다 그렇게 많은 약을 드시면 더더더 나중에 고생하실 거라는 말만 쓴 약으로 삼켰다 나는 어머니 이제 그만 일어 나세요 너무 오래 주무셨어요 그래 그런데 약 좀 다오 소화가 안 되는구나 어 어머닌 아무 것도 안 드셨어요 오후 내내 꿈만 꾸셨잖아요 뒷곁에 심어 놓은 파가 꽃이 폈어요 꽃을 따서 널지 그러세요 씨가 모두 떨어 지겠는데 아 그렇구나 나 처럼 허연 머리를 풀고..... 어머니는 밤꿈이 또 얹히셨는지 부지런히 약장사에게 가신다
│ 
│ 오월 가도록
│ 파꽃이 진다
│ 
┼  ┼
***************************************************************************************************

 추억의 필름을 재생시킨, 애틋한 풍경

                        이  복  현



 민완순의 시는 특히 40대를 살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한 폭의 그림 같은 잔잔한 추억의 영상을 제공한다.
아주 먼 먼 오랫적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대부분 배고픔과 헐벗음으로 일관했던 50년대에서 70년대 사이만  하여도 찌든 가난을 이기지 못하여 몸이 아파도 병원 한번 못가고 약방에 가서 약 한봉지 마음대로  
못 사먹던 시절의 어머니, 우리들의 어머니가 계셨다. 그 때만 해도 오일장이 열리는 시골 장터 한구석이나  마을 공터에 자리를 깔고 확성기를 울리며 약을 팔던 집시같은 떠돌이 약장사들이 많았다.
그것은 우리들의 따뜻한 지난 추억의 한 페이지를 이루고 있기도 하지만, 말할 수 없는 꿈과 애환이 서려있기도 하다. 우리들의 어머니는 여러 번을 속고도 또 약장사의 선전에 귀가 솔깃해져서 비싼 가짜 약을 사들고 와서 좋은 약을 싸게 산 것으로 생각하고 자랑하던 그 무구함이란 오늘날처럼 문명에 오염된 우리의 가슴을 돌아보게 한다. 어느새 남편과 시부모, 자식들 뒷바라지에 머리가 파꽃처럼 새이신 어머니의 모습!
마치 거룩한 성녀처럼 아름답게 우리들 가슴을 수놓고 계시는 어머니!
민완순 시인의 시는 우리를 진한 모정에의 향수, 잃어바린 문명에의 향수 속으로 초대하는 애잔함이 깃들어 있다. 그건 어머니에 대한 소중한 기억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민완순 시인은 추억을 소중히 여기는 시인이며 우리의 향토적 정서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연계시켜 가슴마다 따뜻한 추억의 불을 지펴주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시어의 배열에 있어서 산문형태를 취하고 있는바, 문장 중간에 이어지는 구어체는 굳이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시 속의 화자를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도 적당한 행간과 따옴이 있었어야 하리라고 보며 사실적인 묘사로 일관하기 보다는 적당한 메타포를 사용하거나 어머니의 무구한 표현 속에 깃들어 있는 아이러니를 지극히 평범한 줄기에서 한 차원 더 끌어올리려는 진지한 노력이  있었더라면 시가 훨씬 더 왕성한 생명력을 갖고 태어났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이 시의 군데 군데 진지한 고뇌의 성찰이 없었던 건 아니니, 그 것은 이 시가 우리에게 풍기는 따뜻함이 그것이며 아무렇지 않은 듯 내뱉는 말 중에도 숨겨진 진실함과 사랑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며, 그 점이 우리를 시인의 시에 매료케하는 중심요소가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아우러 볼 때 앞으로 민완순 시인이  좀 더 훌륭한 시를 쓰기 위해서는 시 속에 녹아 있는 줄거리 뿐만 아니라 보다 미시적인 면에서의 시구에 옷입기기, 또한 시어 배열에 있어서의 정확성 등이 고려될 수 있다면 좋으리란 생각이다.  이 시에 있어서 어느 부분 딱히 지적할 수 없는 것도 그 런 점에 연유한 것이라서 결국은 비평의 글도 극히 모호하고 추상적인 말붙임이 되고 말았지만, 언젠가 필자가 말씀 드린 진의를 시인이 스스로의 가슴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순간엔,  분명  보다 확실한 진일보가 있으리라는 것이 시인에 대한 필자의 믿음이다.  

 

 

 

'추억[문학의 즐거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편지(24편)  (0) 2009.09.01
심사평 및 당선소감(4편)  (0) 2009.09.01
문학통신(4편)  (0) 2009.09.01
현대시(제11목록-9편)  (0) 2009.09.01
현대시(제10목록-12편)  (0) 2009.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