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문학의 즐거움]

현대시조(제2목록-24편)

로뎀추리 2009. 9. 1. 15:59

[현대시조]
 
겨울밤에 홀로
이복현
 
 

나는
노래하리
눈 내리는 그믐밤을,
낙엽을 밟고 오는 나비의 발자국을,
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사랑의 속삭임을,

걸으리
밤의 눈동자를 추억하며,
어둠에 수놓인 은빛 꿈을 보듬고
헐벗은 나무둥치에
물오르는 소릴
들으리

나는
얼어 죽으리
못다 핀 꽃들과 함께
온몸의 수분이 증발할 때까지
목마른 수수깡처럼
욕망을 비워 내리

 

 

[현대시조]
 
뉘우치는 겨울나무
이복현
 
 

나무들이 알몸으로 찬비를 맞고 섰다

뼈 시린 기억들을 뿌리 깊이 감아 넣어

내일을 지탱하여 갈 나이테로 새기며,

징벌처럼 몰아치는 비바람을 견디면서

함초롬이 젖은 채 맨발로 서 있다

어제를 뉘우치면서, 검은 죄를 씻으며,

 

 

[현대시조]
 
곶감을 먹으며
이복현
 
 

두꺼운 껍질을 쓰고
슬픔으로 테 두른
내 시詩의 속살을 벗겨
가을볕에 말리면
떫은맛
죄다 가시어
이리 달고 쫄깃할까

 

 

[현대시조]
 
가을의 경전
이복현
 
 

나목 시린 가지
달빛으로 옷을 입혀
먼바다 뵈는 기슭에 등대이고 앉았더니
옛 동무
솔바람으로 와
귀엣말로 밤이 깊다

뜨락에 모인 낙엽
법화경을 외우고
풀벌레 울음소리
숲 가득 넘실댄다
귀 열려 마음 눈뜨니
이 또한 법어로다

 

 

[현대시조]
 
묘비 앞에서
이복현
 
 

거친 돌에 새긴 이름
비에 젖고 바람 맞아
희미한 음각을 트고
이끼 푸르렀다
덧없는
세월은 가고
그리움만 숨을 쉰다

살아서 부르던 노래
그 목소리 생생하다
맑은 혼에 실었던 마음
하늘까지 불어 가서
아픔을
부둥켜안고
뒤척이는 푸른 바람

 

 

[현대시조]
 
햇살에 가슴을 씻고
이복현
 
 

눈 쌓인 산길 같은 지난날의 내 삶에도
표정 없이 돌아앉은 바위 하나 박혀 있다
아파도
울지 못하는
새 한 마리 앉아 있다

외진 곳에 태어나서
비바람에 젖지만
흐리고 안개 낀 날엔
벼랑조차 안 뵈지만
햇살에
가슴을 씻고
웃을 날도 오리라며,

 

[현대시조]
 
햇살에 가슴을 씻고
이복현
 
 

눈 쌓인 산길 같은 지난날의 내 삶에도
표정 없이 돌아앉은 바위 하나 박혀 있다
아파도
울지 못하는
새 한 마리 앉아 있다

외진 곳에 태어나서
비바람에 젖지만
흐리고 안개 낀 날엔
벼랑조차 안 뵈지만
햇살에
가슴을 씻고
웃을 날도 오리라며,

 

현대시조]

 
우리가 한 마리 물고기를 삼켰을 때
이복현
 
 

인간의 뱃속에
병든 잉어가 누워 있다
그 잉어 뱃속에서
징거미가 울고 있다
징거미 목줄에 걸린
물지렁이 꿈틀댄다

 

 

[현대시조]
 
마음의 등불
이복현
 
 

가늘한 바람에도 늘상 흔들리면서
심지 맑게 젖어 있는 등불 하나 있다
날마다
묵념을 담아
하늘길을 여는,

풀씨 같은 별들이
곱게 싹을 틔워
허허로운 가슴을 푸르게 점령해 올
그 날을
기다리면서
생의 뜰을 밝힌다

[현대시조]
 
물수제비
이복현
 
 

게으른 아침나절 해 한참 솟은 다음
금물살 강가에 나가 물수제빌 뜬다
물 위을 내딪는 돌멩이
몸부심이 곱다

목숨도 가벼이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으면
고요한 세상 위로 빛 부시게 내달릴 수 있었으면
어둠의 너울을 벗겨 한줄기 빛을 뿜는,

 

 

[현대시조]
 
구르는 돌
객지생활
이복현
 
 

어제는 닳고닳아 살 깎여도 안 아픈 걸
물살 빠른 냇굽이에 박혀 살던 어제는
그래도
윤이 나는 빛
어우러져 고왔었다

낮으론 공사장 쇳소리에 귀 멀고
갖은 오욕 다 겪으며 채이고 구르다가
밤이면
고향 그리워
별빛 속에 잠든다.

 

[현대시조]
 
좋은 예감
이복현
 
 

수관을 타고 흐르는 물 흐름이 고운 봄
흰 목 무늬 겨울새 울다 떠난 돌배나무에
연두색 생명 한 잎이 삐죽이 돋아난다

 

[현대시조]
 
슬픔은 줄기를 타고 와
이복현
 
 

옹이진 상처들은 뿌리 깊이 묻어 두자
비 젖은 어깨를 털고 일어서는 나무처럼
어느 날
꽃으로 피울
넉넉한 마음으로,

언 땅 깊이 뻗어 있던
뿌리 끝은 시리지만
고개 든 가지마다 길을 열고 반기니
슬픔은
줄기를 타고 와
새 생명을 낳는다

 

 

[현대시조]
 
분수대 앞에서
이복현
 
 

해와 달의 넋으로도 세상 어둠 못 물리쳐
스스로 몸을 부셔 하늘 높이 솟구치니
투명한 눈물줄기가
비처럼 쏟아지네

가슴속에 억제 못할 애절한 사연들을
하늘 높이 뿜어 올려 무지개로 펴 보이면
행여나
내 마음 알고서
바람으로 거두실까

쉬임 없이 솟구쳐도
못 미치는 갈망의 손
허공만 더듬다가 고꾸라져 숨이 져도
끝없는
사랑을 펼쳐
해맑게 웃음 짓는,

 

[현대시조]
 
늦은 귀가
이복현
 
 

가로수 띄엄띄엄 파수 선 밤거리에
잠 못 이룬 신호등은 충혈된 눈 깜박이고
허기진 아스팔트가
눈발에 젖는다

하루살이 모여드는 가로등 골목 어귀
사위는 연탄불에 군밤을 굽는 노파
한 봉지
따뜻한 정을
언 가슴에 안겨 준다

싸락눈은 바람에 날려
아마를 때리는데
아기별 하나가
눈발 속에 깨어 있다
아직도
못단 간 나의 길
저만치 밝혀 주며,

 

 

[현대시조]
 
동지(冬至)
이복현
 
 


                            

    빈 몸으로 이사 가는 기러기 먼 하늘 길
    들꽃 같은 낮달 하나 가슴으로 밀려온다
    이제는   
    눈물도 지운   
    울음의 골짜기

    서리 내린 비탈엔 맨발의 굴참나무 
    시린 발가락을 붙들고 
    얼어죽은 풀벌레들
    못다 한 노래를 풀어
    저리 붉은 강인가

 

[현대시조]
 
겨울밤에 홀로
이복현
 
 




    나는 
    노래하리
    눈 내리는 그믐밤을,
    낙엽을 밟고 오는 나비의 발자국을,
    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사랑의 속삭임을,

    걸으리
    밤의 눈동자를 추억하며,
    어둠에 수놓인 은빛 꿈을 보듬고
    헐벗은 나무둥치에
    물오르는 소릴 
    들으리  

    나는 
    얼어죽으리
    못다 핀 꽃들과 함께-
    온몸의 수분이 증발할 때까지
    목마른 수수깡처럼
    욕망을 비워내리

 

[현대시조]
 
조화(弔花)
이복현
 
 

조 화 (弔花)

  
죽은 자의 목관을 향그럽게 적시는  
금빛 고운 울음을 나 이젠 알 것 같다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생허무상(生虛無常) 숨은 뜻을,           

시취 진동하는 주검 둘레에서 
못다 간 길에 남은 그리움을 지워내며
꺾인 몸  맑은 향내로 마지막을 감싼다.

 

 
 * <월간'현대시' 2001년 4월호에 게재된 작품을 일부 추고 개작하였음> 

 

 

[현대시조]
 
고목 느티나무
이복현
 
 

    고목  느티나무


천년을 서 있어도 푸르게 깨어 있어 
입각성불(立覺成佛)하고서도 아직도 침묵하는 
저 고목 느티나무에 
접 붙고 싶은 마음

한 백년도 못 되어서 
단 한 줌 거름되어
한 평 남짓 잔디 혹은 들풀이나 키워 있을 
이 짧은 목숨의 여정 
겸손히 무릎 꿇다

천수 보살 손을 뻗어 뭇 중생을 어루듯이 
낮에는 지친 목숨들 감싸안는 그늘 되고
밤에는 잠든 영혼의 넉넉한 품이 된다.



< 월간 현대시  2001년 4월호 게재>

 

 

[현대시조]
 
비 개인 아침
이복현
 
 

맑은 꿈을 머금고 하루의 문을 연다
손끝마다 푸른 기운 뻗쳐 닿는 숲 속으로
우윳빛
안개 자욱한
새벽길이 놓인다

새푸른 핏기 어린 망과나무 가지 끝
빗방울 하나 하나에 그리움이 눈뜰 때
한 자락
젖은 하늘이
깃발처럼 걸린다

찬찬히 꿰어 보면 어둠 밝혀 빛난 슬픔
후두둑 떨어지는 알알의 첫사랑이
투명한
실로폰소리로
냉가슴을 울린다.

 

[현대시조]
 
지독한 사랑
이복현
 
 

살아서는 그대 살에 몸 비빌 수 없어서
바람 세찬 언덕에 넘어진 소나무
불거진
허연 뿌리에
버섯으로 피었다

 

 

[현대시조]
 
비룡폭포
이복현
 
 

아찔한 천길 낭하
하늘 닿는 베틀 위에
흰 명주실 한 타래를
날줄로 걸어 두고
내 마음
씨줄이 되어
무지개로 짜인 비단

바람 불어 펄럭이면
초록이 다 묻어서
서늘하게 날 선
장검으로 꽂혀 온다
하늘도
귀를 베여서
피 흘리는 푸른 서슬

 

 

[현대시조]
 
따뜻했던 그 겨울
이복현
 
 

벼 논배미 살얼음에 썰매 지쳐 즐겁던
내 어린 겨울은 바람 불어도 따스했다
방패연
날아간 하늘
푸른 꿈이 맴돌던,

무딘 낫으로 팽일 깎아
한 세상을 세웠을 때
무지개로 살아난 크레온빛 꿈들이
싸늘한
영하의 나날을
따뜻하게 감싸줬다

 

 

[현대시조]
 
고사리 꺾는 처녀
이복현
 
 

안개 낀 새벽 산길
풀잎 헤쳐 온 처녀
고운 종아리가 이슬 흠뻑 젖었네
비 온 뒤
참대밭 위로
귀를 내민 죽순처럼

대바구니 소복이 꺾어 담은 고사리 순
부드러운 눈길에
내 마음도 꺾이네
수줍은 미소를 만나
가슴에도 꽃이 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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