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다리
건너가라고
등을 대는 너는
이 겨울
살얼음 낀 물속에
맨발로 서있구나
시리면 시리다고 말하라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라
말하지 않음으로
더 아픈
사랑을 한번쯤 생각하여라.
늙은 천사
어둠이 내리고
요양원의 밤이 깊어간다
늙은 천사가 잠들 시각이다
내 어렸을 적
청개구리처럼 한사코 어긋진 길을 갈 때에도
원망 대신 조용히 웃음으로 타이르셨고
모두가 나를 핀잔 줄 때에
언제나 내편이었던 그녀는 지금
그토록 당신이 사랑했던 아들,
내 얼굴,이름조차 잊어버렸다.
엉 엉 소리내어 한참을 울었음에도
천사는 더 이상 내 슬픔을 읽지 못하며
내 아픔을 알지 못하며
그저 가만히 초점 잃은 눈동자로
내 얼굴을 응시할 뿐, 머리를 쓰다듬거나
등을 어루만지며 다독 다독 다독일 뿐,
내가 누구냐고 물어봐도, 내 이름이 뭐냐고
몸을 뒤흔들며 채근 하듯 물어봐도
아무런 응답이 없다.
내가 눈에 보이면
멀리서 부터 나를 안아주려고
언제나 팔을 활짝 벌려 기다려주시던
어머니, 늙은 천사
그녀는
내가 밟고 온
가장 빠른 길이었다.
아득한 세상
눈감고도 달릴 수 있는 푸른 길이었다.
그러나 그 길은
아픔을 견디며 등을 내어 준
눈물로 덧대 깁은 신음의 길이었다.
그녀는 빛이었다.
밤새도록 돌아오지 않는 탕자를 기다리며
어두운 골목 끝에 혼자 서있는
외등이었다.
그녀는 눈물이며 꽃이었다.
밤에 내린 이슬처럼, 숨은 불빛처럼
남몰래 울고 남몰래 지는,
그녀는 지금
세상 모든 그리움의 끝에 서있는
외딴집이다.
외로워도 외롭지 않은 듯
목을 빼어 기다리는 모딜리아니...
등대도 없는 먼 섬이다.
은장도
내 안에 칼이 있다
스스로를 베기 위해
가슴 깊이 품은 칼
세상 여느 칼과는 집도법이 다르다.
안으로 향한 칼끝
찌를 때는 깊숙이, 맹렬하게
실수 없이 단번에 끝내야하는
냉혹한 도법
언제나 빛나는 이빨은 칼집 속에 감추고
파수꾼처럼 밤낮없이
뜨거운 앙가슴에 살아있다.
그러나 어찌하면 좋은가
날마다 나를 베어도
날마다 나를 찔러도
나는 좀처럼 죽어지지 않고
분수처럼 솟구치는 피는
온 우주를 물들이고도 멈추지 않는다.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으면서
이토록 가혹하다니
단 한 번도 나를 향해
고백하지 못한 사랑
안에 박힌 절망과 비굴함을 잘라내기 위해
스스로를 벨 수밖엔 없는 가혹함이여
연약한 삶을 지켜내기 위해
홀로 잠든 밤에도 깨어서 우는
슬픈 동반, 은장도여!
너의 근심이 무엇이냐
단 하루도 바람이 그친 적 없고
단 한번도 흔들리지 않은 적이 없지만
땅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일어서는
한해살이 풀꽃도 절망하지 않고
저리 사랑스럽게 웃고만 있는데
너의 근심이 무엇이냐
빛을 찾아가는 하루살이도 저렇게,
그토록 짧은 목숨으로
불의에 항거하듯 두려움 하나 없이
단번에 온몸을, 단숨에 전 생애를
불꽃속으로 당차게 내어던져
분신,분신(焚身)을 꾀하는데...
너의 두려움이 무엇이냐
위험한 은유
보관할 데 없는
나의 생을, 잠시
당신에게 맡기면 어떨까요?
이런 은유는 위험합니다.
혼자일 때, 비로소
정교한 자아로서
참됨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떠날 때는
손을 잡지마세요
마음 한자리 두고 가는 자신을
경계하세요.
가벼움의 기쁨을 알고 있거든,
쥐라기에서 온 편지
궁금하다
쥐라기쯤에 부쳐진 나에게의
한 통의 편지
봉투 속에 갇힌
녹슨 사연들
오랜 시간이 접혀있는
단단한 봉투 속에
깜짝 놀랄 좋은 소식을 담아 싣고
새처럼 날아와서
외로운 가슴팍의
빈 우체통에 꽂혀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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